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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운장(關雲長: A.D.160(庚子)?∼219)

 

중국 삼국시대 촉나라의 장군이다. 지금의 산서성 원청현 하동군 해현 사람.  이름은 우(羽), 운장(雲長)은 자, 시호는 충의후이다.


유비, 장비와 도원의 결의를 하여 평생 의(義)를 지킨 것으로 유명하다

송대 이후 군신(軍神), 복록장수신(福祿長壽神)으로 신앙되고 관제묘가 각처에 건립되었으며 조선에도 임진왜란 이후 관제묘가 건립되었다. 관성제군의 고향인 중국의 황하가 진섬협곡을 내려와서 동쪽으로 꺾어져 흐르는 곳에 운성시가 있다. 그 곳에 중국에서 가장 큰 관제묘가 있다.


관운장의 모습을 전해 내려오는 책을 토대로 살펴보면, 키가 구척장신에 수염의 길이가 두 자로서 삼각수(三角鬚)이며, 입술은 연지를 칠한 듯하며, 눈은 봉의 눈이며, 누에 눈썹같이 짙고, 위풍이 늠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수염이 길고 아름다워 미염공(美髥公)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

 

 


<관운장 이야기>

 

 관운장께서는 산서성에서 태어나서 하북성, 북경 바로 밑에 있는 지금의 탁주시로 간다. 유비의 고향도 탁주이고, 장비의 고향도 탁주이다. 여기서 세 사람이 만나 도원결의를 하게 된다. 이후 관운장은 결의형제한 유비를 위해 일생을 아주 정의롭게 살다 간다. 

  
조조에 대항하여 유비·관운장·장비가 투쟁을 할 때, 관운장은 하비성을 책임지며 형님의 가족인 두 부인과 어린 아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시세(時勢)의 불운(不運)으로 형세가 위태로워 하비성이 조조의 침입으로 함락되고 유비 가족의 생사를 모르게 되자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하려고 하였다.

  이 때 조조의 막하 장군으로 평소 관운장을 사모하던 장료의 ‘자결 삼불가설(三不可說)’을 듣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생각이 모자람을 인정하여 결코 굴욕적이 아닌 항복을 하게 되었다.


 자결 삼불가설은

 

첫째, 한날 한시에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죽을 때는 한날 한시에 죽자는 도원결의(桃園結義)에 위배되는 것이며,

둘째, 주군 (主君)인 유비 형님의 처자는 누가 돌볼 것이며,

셋째, 한나라(漢)를 받들고 억조창생의 고초를 들어준다는 대망을 버린다는 것이다.


  이에 관운장은 항복의 조건으로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그 내용은 첫째, 한나라에는 항복하나 조조에게 항복하는 것은 아니다.

둘째, 두 부인인 감부인과 미부인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의 생명과 생활을 보장할 것,

셋째, 주군의 생사를 알 때는 천리 만리라 해도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투항을 하자, 조조는 자기 밑에 관운장을 데리고 있으면서 어떻게든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온갖 환대를 한다. 3일, 5일마다 연회를 베풀어주고, 벼슬도 주고, 적토마도 주고, 금포도 주면서 마음을 뺏으려고 한다 . 

 

관운장의 마음을 돌려 자기 휘하에 두려는 조조가 하루는 관운장이 입고 있는 옷(綠袍)이 너무 남루하여 새 금포(錦袍)를 내주며 이를 입으라 하였다.

  며칠이 지난 후 조조가 관운장을 보니 아직도 녹포를 입고 있어 의아히 여기니

 

이것은 일찍이 유황숙께서 주신 은의恩衣입니다. 아무리 누더기가 되더라도 조석으로 이것을 입고 벗을 때마다 황숙과 친히 만나는 것 같아 즐거운 기쁨을 느낍니다. 공께서 주신 비단옷은 이 옷 속에 입었습니다.”고 하였다.

 

 관운장은 새 전포를 안에 입고, 유비가 준 낡은 전포를 다시 겉에 입으면서 유비에 대한 마음을 잊지 않으려고 하였던 것이다.
 
 운장이 조조에게 적토마를 받았을 때의 일이다. 전포를 줬을 때는 절을 안했는데, 적토마를 주니까 관

운장이 절을 한다. 그래서 ‘왜 절을 하느냐?’ 하고 물으니 ‘이 말은 하루에 천리를 간다고 하니 적토마를

타면 하루 만에 우리 형님을 만나러 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라고 대답하였다.
 

조조가 이 말을 듣고 “아, 의로운 사람이다. 이토록 충절한 장부도 있단 말인가.”하고 탄복하였다.

 

유비가 살아있다는 편지를 받고나서 관운장은 유비한테 가겠다고 했다. 그러자 조조가 관운장이 도착하

전에 유비가 죽었으면 어떻게 할꺼냐고 물으니 자신도 따라 죽을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조조의 포로로 있는 동안 원소의 부하 안량과 문추를 베어 은혜에 보답한 다음  관운장은 조조에게서 받은 모든 것을 다 봉해서 두고,  오직 적토마만 타고서 두 형수를 호위해서 그 유명한 '오관참장' 다섯 관문, 오관을 돌파해서 유비를 찾아갔다.

그 후 적벽대전 때에는 수군을 인솔하여 큰공을 세우며 적벽대전에서 패한 조조가 화용도로 도망을 갔을 때 조조를 생포할 수 있었음에도 조조에게 입은 후의厚誼를 생각하여 그를 놓아줌으로써 은혜를 갚는다.

그때 관운장은 자신이 가서 조조를 잡겠다며 공명에게 자기를 보내달라고 했다. 조조를 살려주면 자기 목숨을 내놓겠다고 군령장까지 써놓고 화용도로 갔었다.


 후에 형주에서 촉나라 세력의 확립을 위해 진력하다가 조조와 손권의 합공을 받아 마침내 사로잡혀 맥성에서 손권에게 잡혀 목을 잘림으로써 60 세의 나이로 죽음을 당하였다. 

 

관운장은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옥은 깨져도 그 빛은 변하지 않는다.’

내가 죽더라도 나의 의로운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