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을 부리는 비석 ,척주동해비

 

귀신을 부리는 비석 (척주동해비)

개벽은 현실이다. 바로 이 땅 이곳저곳에 개벽의 자취가 남아 있다. 민초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개벽의 이야기, 개벽의 땅 한반도에 흩어져 있는 개벽 이야기를 소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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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 죽는다 했던가! ‘지음知音’이라는 고사가 있다. 중국 춘추시대에 거문고를 잘 연주했던 백아伯牙는 자신의 음을 알아주는 이는 종자기鍾子期뿐이라며 벗인 종자기가 죽자 거문고 줄을 끊고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무릇 사람은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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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이것이 비단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겠는가? 조선 현종 2년(1661년)에 삼척부사三陟府使로 부임한 미수 허목許穆 선생은 고을이 매년 수재로 극심한 피해를 입자, 동해 바다를 달래기 위해 동해송東海頌(동해를 칭송하는 시)을 짓고 이를 비석으로 만들어 세웠다고 한다. 그랬더니 이에 응하여 동해 용왕신이 마음을 풀었고, 그 결과 조수로 인한 피해가 없어졌다고 하는데..

 

고려 말부터 조선 말기까지 역대 삼척 지방을 거쳐간 수령들의 명단을 정리한 책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7월 24일에 대풍우가 몰아쳐 지붕의 기와가 다 날아가고 아름드리 큰 나무가 뽑히거나 부러졌으며 냇물이 넘쳐 논밭이 물에 잠겼다. 동해퇴조비東海退潮碑를 새겨 세우니 조수가 다시는 밀려오지 않았는데, 손수 명문銘文 192자를 지었다. - 「척주선생안陟州先生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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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척주동해비는 퇴조비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이 비석을 세움으로써 조수를 잠재웠다니. 허미수 선생의 혼이 실린 전서篆書가 신명들을 감동시킨 것이리라. 미수 선생의 문집에는 이런 자신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바다 기운이 늘 어둡고 거센 바람과 해일이 많아, 괴이한 변화를 측량할 수 없다. 이에 동해송을 지어 바닷가의 돌에 새겼으니, 무릇 190여 언言이다. -「기언記言」

 

 

송시열과의 예송논쟁으로 유명한 기호 남인의 영수領袖였던 미수 선생이 이 같은 주술적인 행적을 남겼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그러나 미수 선생의 성장 배경을 보면 어느 정도 추론이 가능하다. 미수 선생의 아버지인 허교는 서경덕의 제자였던 박지화의 문인이었다. 박지화는 김시습의 도맥을 이어받은 조선 시대 도가道家의 한 사람이다. 미수 선생이 「청사열전」을 써서 김시습 등 도가 7인의 행적과 전기를 쓴 것은 도가에 관심이 컸음을 보여 준다. 또한 그는 불승이었던 정응과도 친교를 맺고 있었다.

 

미수 선생은 성리학뿐만 아니라 고경, 제자백가서, 도교, 불교 등 다양한 학문 세계를 섭렵한 것이다. 미수 선생이 창안한 ‘미수체’는 전서篆書로 구성되어 있다. 전서는 한자의 가장 기본적인 서체로 한자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미수 선생은 고문의 힘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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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평수토찬비大韓平水土讚碑

 

 

허미수 선생은 실직悉直(삼척의 옛 지명)으로 부임을 받으면서 수재水災에 대한 고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척주동해비 근처에 있는 대한평수토찬비大韓平水土讚碑(대한의 물과 땅을 평정한 것을 찬송하는 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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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는 미수 선생이 형산비衡山碑(중국 형산에 세운 우임금의 치수 사업을 기록한 비석) 77자의 비문 중 48자를 선택하여 목판에 새겨 삼척부에 보관하게 한 글을 비석으로 만든 것이다.

 

1904년 고종 황제에 의해서 현재의 자리에 세워졌는데 우임금과 같이 치수를 하여 수재를 극복했다고 여겨 내려 준 이름으로 보인다. 「기언」에 적힌 미수 선생의 글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하우씨가 수토를 평치한 뒤, 물건의 모양을 따서 글자로 만들어 간악한 귀신과 괴상한 동물이 그 형체를 숨길 수 없도록 하였으므로, 사람이 그 침해를 멀리하여 평지에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 ‘형산비기 무오년(1678년)’

 

 

미수 선생은 우임금이 전서를 가지고서 치수의 사업을 완성한 것을 확인하였다. 형산비의 일부 글자만 따서 글을 지었다는 것은 그 비문의 힘을 빌리려 한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임금의 치수가 단군조선 2세 단군이신 부루태자에게 비법을 전수받아 이루어졌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는 환단 시대의 법이 미수 선생에게 전해진 역사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형산비문의 힘을 삼척 관내에 보관하고 있었고, 미수 선생은 7월에 미수체로 동해송을 지어 수재를 잠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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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럴 적에는 바다를 말려라. 그래야 창생들이 허공에 안 빠지고 다 살아날 것 아니냐! 한 번 죽지 두 번 죽는 것 아니니 조금도 변치 말고 다 나서라. 다른 곳도 네가 통지해서 일이 함께 되도록 하고, 모든 용궁에서 다 나서라.” 하시니 “어찌 변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다짐하더라. (도전 5:72: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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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개벽기에는 화火판과 수水판이 있다. 상제님께서는 개벽기에 많은 창생들을 살리기 위해 직접 용궁으로 가셔서 신명들에게 명을 내리셨다. 저 푸른 바다에는 바다 생물뿐 아니라 수많은 바다 신명들이 살고 있다. 허미수 선생의 척주동해비가 바로 그 증거다.

 

[참조]

*『삼척문화 바로알기』 (개정판, 김태수, 삼척시립박물관, 2018)

*『국역 척주지』 (배재홍, 삼척시립박물관, 2001)

*『삼척향토지』 (김정경 배재홍, 삼척시립박물관, 2016)

*네이버블로그-德田의 문화일기

※삼척시립박물관 관계자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출처) 증산도 공식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