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고백컨대 이 책에 그다지 큰 기대를 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의 목차를 보곤 아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랬다. 이 책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몇몇 예언가들뿐만 아니라, 기독교 불교, 그리고 동서양의 우주관을 두루 파악하여 논리적으로 대비시킨 일종의 철학서적이었다.
 
인류의 종말과 대개벽에 대한 예언은 내게 있어 다소 허황하게 들린다. 과학문명의 발달이 극에 이르고, 생명의 신비까지 한꺼풀씩 벗겨지고 있는 이때에, 일부 선각자들이 주장한 종말에 대한 예언이, 허황되고 공허하게 들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터이다. 문명의 발달에 의해 인간의 사고체계까지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변모해 버린 터라, 나뿐만 아니라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게 느낄 것이다. 결코 실현되지 않을 일종의 주술이나 소문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는 과학에 대한 맹신주의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문명은 정체됨 없이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할 거라는 무턱된 믿음과 막연한 기대감이, 인류 종말에 대한 예언과 애정어린 경고를 무감각한 상태로 받아들이게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 중심주의에 의한 사고나 끊임없이 밀려드는 온갖 정보도 인류 미래에 대한 범우주적 차원의 예언을 귓전으로 흘려듣게 한 원인일 수도 있다.
 
내가 미래에 대한 예언서를 흥미롭게 읽는 것은 바로 그러한 자각 때문이다. 과학과 현대 문명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를 경계하고, 인간 중심적 사고를 지양코자 하는 목적으로, 미래에 대한 예언에 간혹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증산도의 안경전 선생님이 집필한 『이것이 개벽이다』도 그러한 연유로 읽게 되었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컨대 이 책에 그다지 큰 기대를 한 건 아니었다. 미래에 대한 비관적 전망을 담고 있는 여타의 예언서와 뚜렷한 차별성이 있을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일부 예언가들이 주장한 암울한 미래, 즉 지구와 인류 종말에 대한 내용만을 단순히 나열한 책일 수도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 류의 책들은 대부분 종말의 원인을 깊이 있게 분석하여 그 대안방안까지 모색하여 제시하지는 않는다.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불안감을 느끼게 하는 극적인 문장으로 미래를 예측해 놓았을 뿐이다.
 
물론 그처럼 단순한 예언서를 통해서도 얻을 게 아주 없는 건 아니다. 조만간 인류의 미래가 종말을 맞이할 거라고 예언해 둔 책을 접하고 나면, 당장의 내 삶에 대해 되돌아보게 된다.
앞만 보고 달리느라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사람들, 동물들, 더 나아가서는 지구와 우주가 들려주는 본질적인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인간과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해서 새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잠시 잠깐 느끼는 것일 뿐 대개의 경우 곧 잊어버린다. 그런 예언을 한 이들이 있었지 정도로만 기억하고 현대 문명의 속도감에 나를 맡겨 버린다. 그러다가 문득 마음이 공허해지고 뭔가 잘못 살고 있다는 생각이 찾아들면 독서에 빠져들어 예언서도 읽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개벽이다』도 그와 같은 연유로 선택한 것이지만 큰 기대감을 갖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의 목차를 보곤 아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정한 이들이 주장한 미래에 대한 예언뿐만 아니라 기독교와 불교의 구원관과 증산도가 전하는 개벽에 대한 내용까지 방대하게 서술해 놓은 점에 놀랐던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읽었던 예언서는 한 분야의 주장만을 실어 놓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처럼 모든 분야를 총괄하여 다룬 책을 접하고 나니 긴장감과 더불어 생각지 못했던 기대감이 생겼다. 각각의 예언들이 어떻게 연계되어 있는지에 대한 지적 궁금증이 나를 자극했다.
 
내 흥미를 더욱더 자극한 것은 이 책의 편안한 진술 방식에 있었다. 『이것이 개벽이다』는 여타의 예언서와 달리 자극적인 어휘로 불안심리를 조성하지도 않았고, 예언가들이 주장한 미래에 대한 비관적 전망을 단순히 나열한 것에 그치지도 않았던 것이다.
철학적 깊이가 느껴지는 차분한 문체로 각각의 예언들을 소개하면서, 그러한 예언들이 도출될 수밖에 없는 거대한 흐름에 대해 심층적으로 분석해 놓은 점에 나는 연신 감탄하며 읽었다. 『이것이 개벽이다』는 예언서나 종교서라기보다는 철학서적에 가깝게 느껴졌다.
 
그랬다. 이 책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몇몇 예언가들뿐만 아니라 기독교 불교, 그리고 동서양의 우주관을 두루 파악하여 논리적으로 대비시킨 일종의 철학서적이었다. 물론 그러한 분석과 대비를 통해 접점을 찾아내고, 그 접점에 강증산 상제님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증산도를 소개한 종교서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와 불교의 우주관까지 폭넓고 깊이 있게 다루었다는 점을 볼 때, 이 책은 사상서에 가깝다. 때문에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자주 무거운 한숨을 토해냈다.
 
서양 철학에 대해선 대충이나마 꿰고 있지만, 동양 철학에 대해선 극히 무지한 터라, 내겐 너무 어렵게만 느껴졌던 것이다. 증산도에 대해선 약간이나마 알고 있지만, 증산도의 우주관이나 강증산 선생님에 대해선 거의 모르고 있는 지라, 내용 파악이 결코 쉽지가 않았다.
 
글줄이 막힐 때마다 나는 책의 앞부분에 있는 ‘생명의 대도 세계에 들어가는 정신자세’를 되풀이 읽었다. 무엇보다도 마음을 크게 비워야 천지 대도가 열린다는 글귀를 거듭 되뇌었다. 그러고 나면 정신 집중이 되면서 방금 전까지 이해치 못했던 내용이 머릿속과 가슴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 책을 세 번이나 정독했지만 여전히 나는 각각의 내용들을 완전히 숙지하지는 못한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개벽이다』가 품고 있는 철학적 깊이를 내가 어떻게 다 헤아릴 수가 있겠는가.
 
여하튼 꽤 많은 노력을 기울인 끝에 희미하게나마 파악한 내용은 내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지금껏 나는 인류가 파멸의 순간을 맞게 될 거라는 예언에 대해 거의 믿지 않는 쪽이었다. 예언서를 읽고 당장의 삶에 대해 되돌아보긴 했으나, 그와 같은 예언을 결코 신뢰한 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접하고 나니 예언된 내용들이 현실화될 수도 있다는 믿음이 어렴풋이 생겼다. 그것은 내게 충격이었다.
 
내게 그러한 믿음이 생기게 한 건 거듭 말하지만 이 책의 철학적 깊이에 있다. 인류가 파멸의 위기를 겪게 될 거라는 온갖 예언을 서술함과 동시에, 그 원인을 동양 철학에 기대어 분석해 놓고 있어 자연스레 믿음이 생긴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동양 철학의 미래관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건 아니다.
문제는 예언가들이 주장하는 미래의 모습과 기독교 불교 등이 드러내는 우주관이, 동양 철학 그것도 한국 철학과 통할뿐더러 한국의 종교인 증산도로 귀결된다는데 있다. 다시 말해 그러한 예언들이 전우주적인 보편성을 띠고 있다는 데서 신뢰감이 생겼다는 것이다.
 
저자인 안경전 선생님은 한국 철학과 증산도의 사상을 통해, 인류가 파멸의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는 원인에 대해 분석해 놓고 있는데, 그러한 원인 분석도 신뢰감이 생기게 한 주요한 원인이었다.
 
안경전님은 이 책을 통해 서양의 노스트라다무스의 인류 종말론부터 소개한다. 노스트라다무스가 한 예언 중 미처 해독되지 못한 부분들을 조선시대 예언가 격암 남사고 선생님의 글을 빌려 소상히 풀어준다. 노스트라다무스는 현실적인 상황으로 인해 비유적 표현을 많이 썼는데, 저자가 그 표현이 의미하는 바를 밝혀낸 것이다. 가령 노스트라다무스가 인류의 생사를 심판하는 공포의 대왕이 내려올 거라고 한 부분에 대해 격암 남사고 선생님이 ‘소두무족으로 불이 땅에 떨어지는 혼돈한 세상이라’고 한 부분을 대비시켜, 공포의 대왕은 다름 아닌 하늘의 신병인 괴질이라고 설명해 주는 식이다.
 
한편 노스트라다무스는 인류가 파멸하는 순간에 내려올 구원의 절대자를 비유적 표현으로 설명해 놓고 있어 해독이 불가능한 면이 있다. 그런데 격암 남사고 선생님은 동양의 우주원리로 절대 존재자를 명쾌히 드러낸다. 책에 서술된 내용을 그대로 옮기자면, 『격암유록』에 기록된 ‘차운서지심此運西之心’이라는 구절의 ‘西之心’ 곧 ‘서신사명西神司命’이 바로 핵심적인 구원의 메시지라는 것이다. ‘西之心’이란 생명의 구원 섭리를 우주 원리로 표현한 것이며, 西神은 세상을 보편적으로 구원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강세하시는, 인격신이신 우주의 주재자 상제님(하느님)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서신은 가을 개벽의 주제요 결론에 해당되는 말이라고 한다. 가을 개벽이란 용어는 증산도의 미래를 보는 눈과 직결되며,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 사상이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을 동양 철학에 기대어 설명한 저자에 의하면, 인간이 생노병사의 과정을, 겪고 자연이 사계절에 의해 운행되듯이, 우주도 그와 같은 변화의 과정을 밟는다. 우주 역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단계를 밟아 진화하게 되는데, 여기서 봄 여름은 선천의 세계에 속하고, 가을과 겨울은 후천의 세계에 속한다. 한편 우주는 봄과 여름엔 남성적 강함을 뜻하는 태양의 기운을 받고, 가을과 겨울엔 여성적 부드러움을 나타내는 달의 기운을 받는다. 현재 달의 지축이 기울어져 있는 것은 태양의 기운을 받는 시기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숙기인 가을로 넘어가기 직전엔 기울어져 있던 지축이 정립을 하고, 여름의 화(火)의 기운과 가을 초입의 숙살(肅殺) 기운이 동하여 인류는 엄청난 환란과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예언가들과 기독교를 비롯한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등의 종교가 예언하는 인류 파멸의 순간은 바로 우주가 가을을 맞기 전 단계에서 맞게 되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저자는 이처럼 동양 철학과 『격암유록』에 기대어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뿐만 아니라 여타의 예언가들, 그리고 그리스 신화나 종교를 통해 드러난, 인류가 파멸의 순간을 맞을 수밖에 없는 원인에 대해 소상히 분석해 놓았다.
지구의 자전축이 변하고 극이동에 대변혁이 이루어진다고 한 서양의 에드가 케이시나 루즈몽고메리 같은 이들의 예언 등이, 동양철학에선 이미 명쾌히 드러나 있었다는 점은, 나를 경이로운 감정에 빠뜨렸다.
 
동양 철학의 數의 원리를 바탕으로 노스트라다무스와 그리스 신화, 그리고 기독교의 우주관과 예언을 해독한 부분도 나를 놀라게 했다. 동양에선 우주 생명의 창조 원리를 상수철학으로 규명하는데, 9와 7은 분열의 마지막 단계에서 작용하는 수이고, 7은 분열의 최후 단계에서 작용하는 천지기운을 표상한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에 나오는, 1999년 일곱 번째 달에 공포의 대왕이 온다고 한 부분에 대해, 저자는 수의 원리로 명쾌하게 해석해 놓고 있다. 즉 성장과정을 마감하기 직전까지 계속되는 인간 문명과 대자연의 마지막 ‘분열의 최후단계 시점’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거라고 설명한 것이다. 지난 99년,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에 나타난 숫자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여 지구가 종말을 맞이할 지도 모른다고 떠들었던 일부 사람들의 단순함이 새삼 어처구니없게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다소 어렵긴 하지만 저자의 깊이 있는 분석에, 나는 시나브로 이런 저런 예언들에 신뢰감을 갖고 주목하게 되었다.
인류의 미래에 대한 예언은 허황된 소리가 아니라, 우주의 순환 원리에 의해 이미 예비되어 있는 하나의 현상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시간은 직선적인 흐름에 의해 흘러가는 게 아니라 순환의 원리에 의해 되풀이된다는 부분을 읽고선, 우주 역시 그와 같은 과정을 겪는다는 데에 전적인 신뢰감을 갖게 되었다. 봄과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고, 가을의 초입엔 후천 개벽이 일어나, 바야흐로 후천의 세계가 열린다는 이론에도 공감을 하게 되었다. 후천 개벽이 일어날 시점에 닥칠 그 엄청난 재앙에 대해서도 말이다.

종교는 물론이고 인류 미래에 대한 예지력이 있는 이들은, 한결같이 재앙의 시기가 도래하면, 절대 존재가 나타나 인류를 구원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거라고 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앙골무아 대왕으로, 그 밖의 예언가들은 빛을 보았다는 식의 추상적인 표현을 쓰며 인류를 구원해줄 존재가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다. 기독교의 경우엔 주하나님이 친히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 했으며, 불교의 경우엔 미륵부처님이 지상에 내려오실 거라고 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후천개벽 시대를 여는 전지 전능한 존재가 지상에 내려와 끔찍한 재앙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해 줄 거라는 데엔 이견이 없는 것이다.
 
물론 한반도라고 해서 다르진 않다. 한반도에서도 16세기에 대예언가들이 대거 출현하여 절대적인 구원자가 나타날 것임을 예언했다. 동학에선 제3의 종교인 무극대도가 출현한다고 했는데, 이때의 무극이란 천지 만물의 생명의 근원을 의미하며 동시에 우주의 가을철의 대통일 정신을 의미한다. 무극의 천지대운을 주재하시는 천상의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강세하여 무극대도를 선포함으로써, 동서문명이 새 차원으로 개벽되고 비로소 세계의 모든 종교가 통일된다는 것이다. 격암 남사고가 언급한 서신도 절대 구원자를 일컫는 것이다.
 
내가 이 부분에서 특히 주목한 부분은, 천상의 하느님은 바로 불교의 미륵부처님일뿐더러 기독교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천상의 하느님이 각각의 종교에 의해 각기 달리 불리어졌을 뿐, 실제론 동일한 존재라는 것이다. 불교가 미륵불의 존재를 왜곡하고 날조한 사실과 일반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기독교의 제3의 성경 보병궁 복음서를 예로 들어 저자는 이를 철저히 규명한다. 이는 그다지 놀라운 사실이 아니었다.
 
평소의 나는 각각의 종교가 믿고 우러르는 신이 사실은 한 존재라고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다. 우주를 주관하는 거대한 기운을 각각의 종교의 이해에 따라 각기 다른 신으로 추종하는 게 아닌가 했던 것이다. 내가 이 부분에 귀를 기울인 것은 그 어떤 선현들의 철학에 조금도 기대지 않은 나의 사고가 그다지 틀린 것만도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데 있다.
 
그러나 우주의 순행 원리에 의해 후천 개벽의 시대가 도래하고, 그 시대를 열 절대적 존재가 동양에서, 그것도 백의민족이 거하는 땅 한국에서 출현한다고 한 부분은 나를 적잖게 놀라게 했다. 그것은 동양의 사상가들이 예고한 내용일 뿐만 아니라 성경에도 기록된 내용이다. 저자는 앞서 기술한 상수 원리에 기대어 기독교가 여름의 종교이며, 예수를 보내신 천국 백보좌의 아버지 하느님이신 강증산 상제님의 진리를 예비하는 여름철 진리라고 단호히 지적한다.
 
그리고 우주의 순환 원리를 주관하시는 존재, 즉 동방의 한국에서 출현할 존재는 증산도의 상제님이라고 밝힌다. 동서양의 선각자와 동학의 대세자 등이 예언한 절대적 구원자이며, 기독교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불교의 미륵불이며, 격암이 밝힌 西神이, 바로 증산도의 강증산 상제님이라는 것이다. 내게 있어선 적잖이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불신이 생기는 부분은 아니었다. 우주의 순행 원리를 주관하는 어떤 존재나 기운이 있을 거라고 나는 막연하게나마 믿어 왔다. 더불어 기성 종교가 보여준 부조리한 모습에 진력이 나 있었던 터였다. 그런데 우주의 순환 원리를 설명하며, 온갖 예언가들과 각각의 종교가 밝힌 미래에 대한 예언을, 일목요연하고도 깊이 있게 분석한 후에, 상제님의 존재를 드러내니, 나로선 믿음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자에 의하면 증산도의 강증산 상제님은 19세기에 전라도 정읍에서 탄강하셨다고 한다. 어릴 땐 혜명하셨고 청년 시절엔 정의로웠던 상제님은 천하유력을 끝낸 후, 자신이 천지를 개벽하고 불로장생의 선경을 건설하는 옥황상제라고 선포하셨다. 후천개벽 시간대의 정신을 상징하는 양띠 해[辛未年]에 강세하신 상제님은, 파탄에 이를 인류를 구원할 전지 전능한 존재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상제님의 무극대도는 기존의 묵은 관념과 독선으로 인해 지금껏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후천개벽 시대로 들어서는 구원의 진리를 내려 주신 후 천상 옥경의 보좌로 돌아가신 상제님을 섬기고 따르는 증산도만 남아 있을 뿐이다. 앞서 언급한 예언가와 종교, 그리고 설총과 진표 대성사, 중국의 주장춘 등이 조선에서 출세하실 상제님을 미리 알려 주었으나, 상제님의 존재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저자의 표현대로 묵은 관념과 독선 그리고 혼탁한 세상이 상제님과 상제님이 설파하신 진리를 가리고 있는 것이다.
 
후천개벽의 시기에 닥칠 엄청난 재앙이 어떻게 극복되는지, 그리고 상제님이 인류 구원을 위해 내려주신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선 하권에서 다루고 있다. 하권은 아직 출간되지 않은 터라, 현재의 나로선 그에 관한 내용은 소상히 알 수가 없다. 그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나는 겸손한 마음으로 다가설 것이다. 후천개벽이 도래한다는 다소 허황하게 들렸던 예언을 보편적인 진리로 받아들이게끔 한, 저자 안경전 선생님은, 그런 내게 온전한 믿음을 안겨 줄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나는 또 이 책의 내용을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 매몰되고 현대 문명의 세례를 받으면서, 당장의 생활에 급급하여, 증산도의 상제님은 물론이고, 후천개벽이란 용어조차 까맣게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누군가 증산도와 후천개벽을 이야기하면 또다시 허황하게 들을 수도 있다.

나는 내가 결코 그렇게 되기를 원치 않는다. 우주의 순환을 주재하시는 상제님이 들려주는 구원의 진리에 귀 기울여 천상계와 인간계가 화하는 세상에서 오래 존재하고 싶기 때문이다. 지금 내 영혼은 상제님이 들려주는 우주의 소리에 한껏 부풀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