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668년 겨울, 흰 옷을 입은 수만 명의 사 람들이 북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초겨울인데도 만주 벌판엔 매서운 눈보라가 날렸다.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드센 눈보라를 헤치며 힘겨운 걸음을 옮기는 대열의 맨 앞, 짐승의 우리처럼 생긴 수례에는 고구려의 28대 왕 보장이 타고 있었다. 편의상 사서에는 보장왕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에게는 정식 시호(제왕이나 종친, 또는 일정한 품계 이상의 관리가 죽었을 때 생전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추증하는 별도의 존칭)가 없다. 그는 나라를 잃어버린 군주이기 때문이다. 보장은 그의 본명일 뿐이다.

   한 나라의 국왕이었지만 부모가 지어준 이름으로만 역사에 기록된 비운의 주인공, 하염없이 날리는 눈발 사이로 보장왕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태막리지만 살아 있었어요!"

 

   태막리지란 645년부터 20여 년간 지속된 당과의 전쟁에서 고구려를 끄떡없이 지켜낸 영웅 연개소문을 뜻했다. 보장왕은 연개소문에 의해 시해된 영류왕의 조카였다. 642년 고구려 평양성은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이날은 천리장성 축조 현장의 감독으로 떠나는 연개소문의 열병식이 있는 날이었다. 연개소문은 이날 열병식에 참석했던 수백 명의 귀족들을 참살하고 궁 안에 숨어 있던 영류왕까지 무참하게 살해한 뒤 정권을 장악했다. 정변의 명분은 굴욕적인 대당외교를 중지하고 고구려의 자존심을 회복한다는 것이었다.

   이 때부터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일인독재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그는 보장왕을 올립한 뒤 스스로 태막리지가 되어 병권과 정권을 동시에 장악했으며 고구려 9백 년의 역사에서 그 어느 장상이나 제왕도 가지지 못한 권력을 쥔 사람이 되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상고사>에서 쓴 것처럼 이때 고구려의 모든 권한은 연개소문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고 왕은 그저 옥새만 찍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귀족들이나 왕실 내부에서 크게 반발하지 못한 것은 어느 정도 정변의 명분이 통했기 때문이다.

   연개소문은 당나라의 위세에 굴하지 않는 보다 강력한 제국을 꿈꾸는 고구려인들의 열망에 불을 붙였다. 적어도 그가 살아 있는 한 그 열망은 실현될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20여 년간 고구려의 실질적인 지도자로 군림하면서 몇 가지 치명적인 오류를 범했다.

 

   정변의 직접적인 원인은 영류왕과 귀족들이 연개소문의 막리지 계승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막리지는 세습직으로 아버지가 죽으면 그 아들이 직위를 이어받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연개소문과 정치적 노선을 달리했던 영류왕과 귀족들은 뚜렷한 이유도 없이 승인을 거부했다. 결국 신변에 위협을 느낀 연개소문이 먼저 칼을 빼어든 것이다. 이것은 정변의 순수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지만 그가 정권을 잡은 뒤에도 왕실은 보존되었다는 점에서 반역이 아니었다는 옹호의 목소리가 힘을 얻는 것도 사실이다.

   영류왕 시해 사건 이후 연개소문의 정책 가운데 가장 모순된 부분도 바로 이것이다. 그는 자신이 정권을 잡은 뒤 막리지의 세습을 페지하는 대신 연씨 일족들로 그 자리를 채웠다. 이러한 권력의 독식은 고구려 붕괴의 결정적 빌미를 제공했다.

 

   연개소문에겐 장남 남생을 비롯해서 남건 남산 세 아들이 있었다. 연개소문은 장남인 남생을 15세 때 중리소형에 임명하고 23세가 됐을 땐 중리부 최고 관등인 중리위두대형에 올렸다. 중리부란 국가 기밀을 다루는 정보 부서로 군사권까지 장악하고 있는 막강한 권력 기관이었다. 결국 고구려를 말아먹은 건 이 무능한 아들들이었다.

 

   연개소문이 죽은 뒤 고구려는 극심한 내분으로 몸살을 앓았다. 내분의 원흉은 연개소문의 아들들이었지만 그 배후에는 당나라 첩자들의 활약이 있었다.

 

    "조심하십시오. 지금 평양성에선 두 아우 분들이 결탁하여 태막리지 어른을 헤치려 한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어느 날 연남생의 심복 가운데 하나가 심상치 않은 이야길 꺼냈다. 연남생은 자격지심이 강하고 의심이 많은 위인이었다. 마침 그는 변방을 순시하던 중이었다. 자신이 도성을 비운 사이 두 아우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첩자의 말에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얼마 후 그는 부하를 평양성에 보내 동정을 알아보도록 시켰다.

   이 무렵 평양성에선 당의 또 다른 첩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연남산에게 접근하여 심복 노릇을 하고 있었다. 연개소문의 셋째아들인 남산은 중리대형과 중군주활을 겸하고 있었는데 유사시에 병력을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태막리지 편에 심어놓은 우리 측 정보원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조만간 암살자가 성으로 들어올 것이니 누구든 수상한 자가 있으면 무조건 처단하셔야 합니다."

    "설마하니 형님이 친동생인 우리들을 죽이려고 하겠느냐?"

   나쁜 말일수록 귀에는 솔짓한 법이다. 연남산은 처음엔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불안한 건 사실이었다. 그는 이 일을 둘째형인 연남건에게 전했다. 연남건 역시 설마하면서도 의심하는 마음을 떨쳐내지 못했다.

   며칠 후, 연남생이 보낸 부하가 평양성으로 잠입해 들어왔다. 연남건은 특별한 용건도 없이 평양성 안팎을 살피고 다니는 그들 불잡아 고문 끝에 형인 연남생이 자신들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아무도 모르게 연남생의 부하를 처치한 뒤 연남건은 왕명을 사칭해 태막리지 소환령을 내린다.

   한편, 평양성으로 보낸 부하가 돌아오지 않는 것에 신경을 곤두세우던 연남생은 심복들로부터 그가 이미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평양성으로 절대 가시면 안 됩니다."

   연남생은 심복들의 말대로 소환령에 응하지 않았다.

   얼마 후 연남건이 태막리지가 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중앙의 군사들이 그를 체포하기 위해 오고 있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당환한 연남생은 국내성으로 몸을 피하고 심복들과 대책을 논의한다.

    "어차피 고구려는 태막리지께 등을 돌렸습니다. 차라리 당나라 왕실에 도움을 청하십시오. 고구려 조정을 뒤엎는 일이라면 그들은 누구와도 손을 잡으려 할 것입니다."

 

   첩자들의 농간에 휘말린 연남생은 결국 살아남기 위한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된다. 그가 자신의 아들 헌성을 보내 구원을 청하자 측천무후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당고종은 이 무렵 측천무후의 말이라면 무조건 수용했고, 그녀는 당의 실질적인 군주로서 모든 정사를 주관하고 있었다. 고구려에 첩자를 보내 연남생 형제들을 이간시킬 아이디어를 낸 것도 그녀였다.

 

 

   667년 9월, 당나라 군대의 침공으로 고구려 신성이 허망하게 무너졌다. 고구려 서부를 지키는 요새 중의 요새로 알려진 신성이 무너진 것은 이미 당에 투항해서 벼슬까지 받은 연남생의 수하가 그곳 성주를 포박하고 성문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끝까지 성을 사수할 각오로 목숨을 내걸고 싸우다 포로가 된 고구려 사람들은 이때 침략군의 선봉에 선 자가 연개소문의 장남인 연남생이었다는 사실에 충격과 분노를 가누지 못했다.

   신성의 함락은 주변 16개 성의 함락으로 이어졌고, 곧이어 요하 일대를 지키던 부여성의 함락과 더불어 40여 성이 힘없이 무너져버렸다. 연개소문이 필생의 목적으로 삼았던 것은 고구려의 안전을 위협하는 당을 완전히 거꾸러뜨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과 함께 고구려는 승자에서 패자의 자리로 밀려나고 있었다.

 

   668년 9월, 수도 장안성은 당군에 겹겹이 포위되었다. 겁에 질린 연남산은 백기를 들고 제 발로 당군의 진영에 찾아가 투항해버렸다. 성 안에 남아 있던 보장왕과 연남건은 당나라와 내통하고 있던 승려 신성의 무리가 성문을 열어주는 통에 당군에 생포되고 만다.

 

   그러나 주몽이 나라를 세운 이래로 7백 년, 길게는 9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동북아시아의 강자로 군림했던 고구려가 이처럼 허망하게 무너질 수는 없었다. 677년은 공식적으로 고구려가 당에 멸망한 지 5년째 되던 해였다. 국내성이 무너진 뒤 귀족들을 포함, 20여 만 명의 포로들과 함께 당에 끌려갔던 보장왕은 이 해 안동도독 조선국왕에 봉해져 요동으로 돌아온다. 요동 지방은 668년 이후 끈질기게 고구려 부흥 운동이 일어났던 곳으로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이 가장 거세게 나타난 지역이다. 측천무후는 당나라 입장에선 골칫거리인 요동 지방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한민족인 보장왕을 총수로 내세웠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당시 안동도독부가 있던 위치는 당군의 침입에 맨처음 무너진 신성 주변이었다. 보장왕은 이 지역에 아직 고구려의 혼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놀라움과 감동을 주체할 수 없었다. 졸지에 나라를 잃고 분통해하던 고구려 유민들에게 왕의 귀환은 새로운 희망이었다. 보장왕은 그들의 뜨거운 염원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고구려 유민들을 잘 다스려서 정책에 협조할 수 있도록 하라는 당의 요구를 묵살하고 스스로 반대 세력의 선봉에 섰다.

 


 

681년 보장왕은 말갈족과 연계하여 당과 맞설 준비를 하고 고구려 유민들을 하나로 모았다. 그러나 진작부터 이 지역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던 당은 군대를 동원하여 부흥군을 진압하고 보장왕을 다시 내재(內地)로 끌고 가 유배시켜버렸다.

    "연개소문 한 사람이 죽었다고 나라가 망하는구나!"

   1년 후 보장왕은 유배지에서 오욕의 인생을 마감한다. 당은 그 시신을 돌궐족 추장의 묘 옆에 묻고 비석을 세웠다.

 

   578년 북주의 무제가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크게 패하고 물러간 이후 90년 동안 고구려는 한 번도 중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적이 없었다. 수나라의 4차례에 걸친 도발을 잠재우고 난 뒤 이어지는 당태종의 복수전에도 고구려는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았다. 거듭되는 이 전쟁의 패배로 포한이 맺힌 당태종은 죽기 전에 자신의 아들에게 "절대로 고구려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지 말라."는 유언까지 남겼다. 연개소문이 살아 있는 한 고구려는 감히 그들이 넘볼 수 없는 강국임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결국 고구려는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버렸다.

연개소문,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고구려 흥망의 중에 그가 있었다고 믿는다. 어떻게 한 사람의 무장이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데 그토록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