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왜 고구려사를 삼키려 하는가

 

한국의 역사 主權에 대한 중국의 심각한 도전

●김정일 정권 붕괴시 옌볜 조선족자치주의 동요 막으려는 심모원려
●“옌볜의 지식인 사회는 ‘술렁’, 그러나 한국의 학계와 정부는 ‘조용’”
●한국의 북방사 연구 저작물 분석하는 중국의 역사 연구기관들
●고구려를 중국 변방 정권으로 자리매김하려는 ‘東北工程’ 프로젝트
●日本, 발해는 중국사로 고구려사는 한국과 중국사 양쪽으로 분류

‘고구려사는 중국사의 일부’라는 내용의 시론을 담고 있는 광명일보 인터넷판과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소개하고 있는 중국변강사지연구 중심의 사이트

지난해 초 기자는 교토(京都)에 있는 일본 국립박물관을 찾아갔다가 깜짝 놀랐다. 교토 박물관 벽에 걸려 있는 동북아시아 연표에 ‘한국 역사 속에 포함돼 있는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던’ 고구려사가 한국과 중국 역사 양쪽으로 분류돼 있고, 발해는 아예 중국사 쪽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접 국가끼리는 영토와 역사 문제를 놓고 다투게 마련이다. 한국은 일본과 독도 영유권 문제로 다투고 있으며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시비를 놓고 외교 마찰을 빚기까지 했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과 중국의 역사 문제에 관해서는 ‘제3자’이다. 더구나 일본은 중국과 경쟁관계에 있는 데도 고구려사를 한국사와 중국사 양쪽으로 나눠 놓았고 발해사를 중국사로 분류해놓았다. 언제부터 일본이 ‘친중국’이 되었나?

난생 처음 이러한 자료를 접하고 나자 상당히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아무튼 그 후 기자는 한국의 관련학자나 고위인사들을 만날 때마다 이 이야기를 꺼냈다. ‘어찌하면 좋으리까.’

 

이제야 부활하는 北方史

해군은 KDX로 나가는 신형 구축함을 건조하며 고구려의 위인 이름을 붙였다. KDX-Ⅰ 제1번함은 ‘광개토대왕함’, 제2번함은 ‘을지문덕함’, 제3번함은 ‘양만춘함’이다. 기자는 해군이 차후 건조할 함정에 발해 창시자인 대조영(大祚榮)의 이름을 붙일 계획이 없다는 것을 알고, 해군 관계자를 만날 때마다 “새로 짓는 함정 중 한 척에는 반드시 대조영이란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이 먹혀든 것일까. 아무튼 해군은 KDX-Ⅱ를 건조하면서 애초 계획을 바꿔 현재 건조하고 있는 제3번함을 ‘대조영함’으로 부르기로 결정했다. 이미 건조된 KDX-Ⅱ 제1번함과 2번함은 ‘충무공 이순신함’과 ‘문무대왕함’이다. 제4번함은 ‘왕건함’, 제5번함은 ‘강감찬함’, 제6번함은 ‘최영함’으로 이름 지을 예정이다. 한반도에서 활약한 영웅의 이름만 붙이려던 애초의 계획을 바꿔 만주벌판을 누빈 호걸 이름을 넣기로 한 것이다.

한편 육군은 지난 2000년 ‘천하제일군단’으로 불리던 제1군단의 별명을 ‘광개토군단’으로 바꾸었다. 이로써 우리는 해군의 ‘광개토대왕함’과 ‘대조영함’, 그리고 육군의 ‘광개토군단’을 갖게 되었다.

사실 한국이 한민족 북방사에 눈을 돌린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그 이전까지 고조선에서 고구려와 발해로 이어지는 한민족 북방사에 대한 연구는 오히려 북한이 주도했다.

이는 김일성(金日成)이 정권의 정통성을 고조선과 고구려에서 찾으려 했고 이에 대응해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에서 남북통일의 기백을 이으려 했기 때문이다. 1994년 10월11일 북한이 식량난과 경제난이 심각한 가운데에도 단군릉을 완공한 것은, 그들의 정통성을 한민족 북방사에서 찾으려는 노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2002년에 열린 한·일 월드컵은 한국에서 한민족 북방사를 극적으로 부활시킨 일대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온 나라를 “대-한민국”이라는 함성으로 뒤덮은 붉은악마가 중국 신화에서 ‘전쟁의 신’이자 ‘군신(軍神)’으로 나오는 동방의 지도자 치우천왕(蚩尤天王)을 자신들의 상징물로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사학계에서 정식으로 인정하는 학설은 아니지만 ‘한단고기(桓檀古記)’ 등에 따르면 한민족사는 환인이 다스리는 환국에서 환웅이 건국했다는 배달국으로, 그리고 단군이 세운 고조선으로 이어진다. 치우는 배달국의 14대 천왕으로 매우 용맹스러웠으며 중국인의 조상인 황제(黃帝)와 많은 전쟁을 치러 그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줬다고 한다. 그러나 치우는 황제와의 마지막 싸움에서 패하여 죽었다. 중국 민족은 이러한 치우를 군신으로 받아들여, 한(漢) 고조 유방(劉邦)은 전쟁에 나갈 때마다 치우천왕의 사당에 제를 올렸다고 한다.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 의도

이러한 치우의 등장은 한국 민중이 갖고 있는 ‘대륙과 백두산에 대한 그리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민족 북방사를 보다 분명히 규명하려면 철저한 학문적 연구가 뒤따라야 한다. 화약처럼 폭발하는 민중의 정서가 아니라 꼼꼼함과 인내로 상징되는 정치한 연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한국이 중국과 수교한 것이 불과 11년 전이고 아직도 남북이 분단돼 있다는 현실은, 한민족 북방사를 연구할 충분한 인원과 자료를 확보하는 데 있어 제약 요인이 되고 있다. 그러는 사이 일본은 고구려사를 중국과 한국 양쪽에, 발해사는 아예 중국사에 넣어버린 것이다.

최근 기자는 중국을 출입하는 한 사업가로부터 중국 공산당의 당보이자 당의 논리를 정확히 대변하는 것으로 정평이 난 ‘광명일보(光明日報)’에 ‘고구려는 중국 동북지역에 있던 변방민족의 왕조였다’는 내용의 글이 실렸다는 제보를 받았다. 이 사업가는 “옌볜(延邊) 조선족자치주의 지식인들은 이러한 내용 보도 이후 크게 ‘술렁’이고 있다. 그런데, 정작 한국에서는 학계와 언론계 모두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베이징(北京)에 있는 한국 언론의 특파원들은 이를 보지 못했거나, 보았더라도 별것 아니라고 무시한 것 같다. 아니면 중국 정부를 의식해 못 본 척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중국은 한국 특파원에게 6개월마다 비자를 갱신해주고 있어 중국에 불리한 기사를 쓴 특파원은 비자 만료를 이유로 언제든지 쫓아낼 수가 있다. 따라서 베이징 특파원들은 이 문제를 거론하기 어렵고 천상 한국에 있는 기자가 제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정일 정권 붕괴 이후를 대비(?)

그는 옌볜에 있는 조선족 지식인들의 말을 인용해 이렇게 덧붙였다.

“일제시대 만주로 나온 조선인들이 중국인과 더불어 항일 투쟁을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항일 투쟁을 한 조선인 중의 하나가 김일성이었다. 그러나 마오쩌둥(毛澤東) 시절 조선족은 ‘조선족이 항일 투쟁에 참전했었다’는 것을 말하지 못했다. 특히 문화혁명 때는 소수민족을 탄압하는 분위기 때문에 더더욱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조선족이 ‘일제 침략기 조선인들이 중국인들과 더불어 가열찬 항일 투쟁을 벌였다’고 말하게 된 것은 덩샤오핑(鄧小平)이 집권하고 난 다음이었다. 그런데 개혁·개방이 많이 진척된 지금 중국 공산당을 대변하는 ‘광명일보’가 ‘고구려는 중국 역사의 일부분이다’라는 내용의 글을 게재한 것이다.

추측컨대 중국은, 한국과 미국이 옌볜을 김정일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한 교두보로 이용할 것을 사전 차단하기 위해 이러한 글을 게재한 것 같다. 또 김정일 정권 붕괴 이후의 상황에 대비하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김정일 정권이 붕괴되고 한반도에 ‘통일’이라는 새로운 질서가 건설되면, 한반도의 4분의 1 크기(4만3547㎢)에 200만 인구를 가진 옌볜 조선족자치주가 동요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조선족자치주가 동요하면 시짱(西藏)자치구에 있는 티베트인과 신장(新疆·위구르)지구에 있는 회교도들도 술렁거릴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움직임이 커지면 중국은 5대10국(5代10國) 이후 새로운 분열기로 들어갈 수도 있다. 중국은 춘추전국시대 이후 수많은 분열을 겪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따라서 고구려는 원래 중국사의 일부였다고 미리 강조함으로써 김정일 정권 붕괴기에 있을지도 모를 조선족의 동요를 차단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 사업가의 전언과 해석이 사실인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중국이 한국 학자들이 수행한 고구려사 등에 대한 연구 자료를 대대적으로 수집해가는 것은 사실이다. 지난 8월6일자 ‘중앙일보’는 고구려와 발해 등 한민족 북방사를 연구해온 한국 학자들이 중국의 연구기관으로부터 ‘당신의 저작물을 중국어로 번역해도 좋겠느냐’는 연락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이어 ‘중앙일보’는 ‘학자들은 중국 연구기관의 제의를 처음에는 좋은 뜻으로 생각했으나 곧 중국이 고구려사 등을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기 위한 논리를 세우려 한다는 것을 알고 불쾌해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에서 실명이 거론된 한 학자는 이 보도가 사실임을 인정했다.

(신동아 9월호 : 계속 이어집니다.)

 

* 환단고기에서는 황제가 마지막 73회 전투까지 전패를 했다. 중국 지나 역사가 사마천이 사기에서 금살치우(치우를 잡아 죽이다.)라고 역사 왜곡을 했다. 치우천황은 배달국 14대 자오지 환웅의 별명으로 치우천황이 죽은 것이 아니라 치우천황의 장수 치우비가 공격을 서두르다 적의 공격을 받아 죽은 것이다. 바로 사마천은 자기 과거 조상들의 수치스런 역사를 숨길 목적으로 치우비가 죽을 것을 마치 치우천황이 죽은 것인양 역사 왜곡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