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시조는 추모왕? 동명성왕

고구려의 시조는 추모왕입니다.

이는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시조라는 동명성왕은 추모왕인 고주몽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시조 정식명칭은 동명성왕이 아닌 추모왕입니다.

그 이유는 광개토대왕릉비에 고구려의 시조가 추모왕이라 기록되어 있다 는 점입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고구려 시대 고구려인들이 만든 기념물입니다.

고구려 시대 고구려인이 만든 작품에 고구려 시조가 추모왕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고구려인들이

자신들의 시조를 동명성왕이 아닌 추모왕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추모왕과 동명성왕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이 동명성왕이라 불리운 까닭은 그럴만한 사정이 있습니다.

사실 동명왕은 원래 부여의 시조 임금 칭호였습니다.

부여의 시조인 동명왕은 원래 고리국 사람이었습니다.

후한시대 왕형이 쓴 『논형』에 의하면 부여의 건국설화가 나오는데 놀랍게도 그 설화가 고구려 건국설화

와 일치한다는 점입니다.


"북쪽 이민족 탁리국(고리국)에 왕을 모시는 여자시종이 임신을 하자 왕이 죽이려 했다 그러자 여자 시종은 계란 같은 큰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와 임신하게 되었다고 답했다. 나중에 아이를 낳아 돼지우리에 버렸지만 돼지가 입으로 숨을 불어넣어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구간으로 옮겨놓고 말에 밟혀 죽도록 했으나, 말들 역시 입으로 숨을 불어 넣어 죽지 않았다.
왕은 아이가 아마 하늘의 자식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의 모친에게 노비로 거두어 기르게 했으며 동명(東明)이라 부르며 소나 말을 치게 했다. 동명의 활 솜씨가 뛰어나자 왕은 그에게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워 그를 죽이려 했다.
동명이 남쪽으로 도망가다가 엄체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었고 동명이 건너가자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져 추적하던 병사들은 건널 수가 없었다. 그는 부여에 도읍하여 왕이 되었다. 이것이 북이에 부여국이 생기게 된 유래이다."


이 설화는 고구려의 건국설화와 이야기의 모든 것이 같지만 이것은 고구려가 아닌 부여의 건국설화입니

다. 기록상으로 본다면 동명왕의 이야기가 원형이며 추모왕의 이야기는 동명왕의 이야기를 수정한 것

입니다.

우선 부여와 고구려의 건국설화가 같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고구려가 부여와 건국신화를 공유할 수 있을만큼 동일한 문화전통을 가졌다는 것
2.동명과 추모왕이 알과 관련있는 난생신화를 통해 범 동이족의 공통된 정서(중?동해안에서 서국을 세워 중국을 벌벌떨게 만든 서이족의 서언왕, 가야의 김수로왕, 신라의 박혁거세와 석탈해)를 갖고 있다는 점 입니다.

-------- 동명왕 신화와 추모왕 신화 ---------

동명왕신화(부여)

1.출생지: 고리국, 탁리국
2.어머니: 탁리국왕을 모시는 시종
3.임신경위: 하늘에서 내려온 달걀같은 기운
4.탄생상황:일반아이와 같은 태생(胎生)
5.시기한 상대: 탁리국 왕
6.도망간 방향: 남쪽
7.건너간 강이름: 엄체수,시엄수,엄수,엄표수
8.건국한 국가: 부여
9.기록된 책들: 논형,위략,수신기,양서,수서,북사,업원주림


추모왕 신화(고구려)

1.출생지: 부여국
2.어머니: 유화부인
3.임신경위:유화부인을 쫓아온 햇빛
4.탄생상황: 난생, 큰 알에서 낳음
5.시기한 상대: 부여의 왕자들
6.도망간 방향:동남쪽
7.건너강 강이름:보술수,엄체수,엄호수,엄리대수
8.건국한 국가: 고구려
9.기록된 책들: 광개토대왕비,위서,삼국사기,동명왕편,삼국유사,주서,통전


상호공통점: 짐승의 보호를 받음, 활을 잘쏘고 말을 기름, 자라와 물고기의 도움을 받아 강을 건넘 ,

기본적인 이야기 구조가 같음.


------------------- 고구려의 영웅 만들기에 사라진 동명왕 -------------------------

부여의 건국 영웅인 동명왕은 건국신화를 제외한 일반 역사서에는 그 실체가 누구인지 나타나지 않습니다. 해모수나 해부루를 치칭하는 것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습니다.
다만, 그는 부여족이 숭배한 위대한 영웅이었음에는 분명합니다.
고구려에서 그의 건국신화를 채용할 만큼 그가 부여족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대단했습니다.

출신지, 시대가 다른 두 사람의 이야기가 한 사람의 이야기로 혼합되었을까?

고구려는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나라입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대무신왕 5년(서기 22년)의 부여 공격을 시작으로 부여를 능가하는 강국이 됩니다. 서기 3세기에 이르러 부여는 선비족의 공세에 밀려 명맥을 유지하는 약소국이 되었고 실제로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게 됩니다. 고구려는 이 지역에 북부여수사를 두어 다스렸습니다.

고구려는 6대 태조대왕의 즉위를 통해 왕실이 비류나부(소노부)에서 계루부로 바뀌면서 역사를 재정립합니다. 이 무렵부터 그들의 시조인 추모왕의 건국을 신화로써 미화하기 시작합니다. 391년에 등극한 광개토대왕 시절에는 추모왕의 건국신화가 확립되어 일반 백성들도 건국신화를 전부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미 추모왕을 미화하기 위해 부여의 건국영웅인 동명왕의 건국신화가 그대로 채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여국은 고구려가 자신들의 건국신화를 빼앗아가도 반대할 수 없을 만큼 약소국으로 전락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기는 동명계 신화가 전해지는 『위략』의 성립연대인 3세기 초반보다는 늦지만 동천왕 때 수도를 위나라에ㅔ 점령당했던 국가적 치욕을 치유하는 과정에 있던 중천왕 시대부터 부여 방면으로 세력을 확장한 서천왕 시기를 거쳐 대외적으로 다시 팽창한 미천왕 시대에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구려의 건국신화가 다시 정리되어 대내외에 과시되자 430년경 고구려를 방문한 북위의 사신의 견문을 듣고 적은 『위서』에서 비로소 중국인들도 추모왕의 건국신화를 <고구려전>에 수록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아울러 삼국사기, 삼국유사, 동명왕편 등 고려에서 만들어진 국내의 역사책에서도 고구려에서 전해지는 건국신화를 그대로 전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삼국사기는 추모왕을 동명성왕이라고 못받고 있어 두 사람간의 차이를 전햐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역사는 항상 승자의 기록이므로 동명왕의 건국신화는 사라질 뻔하고 대신 추모왕의 건국신화가 울에게 더 많이 전해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