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의 뿌리, 단군문화를 찾아서
 

 
 지난 1월 25일, 증산도사상연구소는 단군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지면에 발표해 온 역사학계의 대표적인 사학자 박성수 교수를 초청해 콜로키움을 개최했다. 광활했던 옛 조선의 강토를 되찾아주는 문일평의 『조선 역사 강좌』, 대륙의 지배자이자 웅혼했던 민족혼을 일깨워준 신채호의 『독사신론』, 옛 조선민족문화의 맥을 회복해주는 정인보의 『조선사연구』 등 상고사 분야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박성수 교수의 특강은 우리 국토 곳곳에 남겨진 단군문화의 자취를 찾아가는 내용으로 진행되었다. 이날 특강은 인터넷 방송을 통해 국내외에 생중계 되어 많은 이들이 조상의 웅혼한 얼을 되새기고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우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본 기사에 실린 자료사진 등은 박성수 교수의 저서 『단군기행』에서 인용하였음을 밝혀드립니다)
 
 
 단군 이전에 실존했던 뿌리역사
 제가 과거 한 일간지에 <단군문화기행>을 연재했는데, 제일 먼저 간 곳이 어디냐 하면 태백산엘 갔습니다. 태백산(太白山)은 원래 백두산을 부르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묘향산도 태백산이라고 불렀고, 금강산, 설악산, 덕유산, 지리산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많은 산들이 태백산으로 불렸습니다. 단군문화는 이 태백산(太白山)과 관계가 있습니다.
 
 태백산의 ‘태(太)’ 자는 크다는 뜻으로 우리 고어의 ‘한’과 같은 의미입니다. 또 ‘희다’는 뜻의 ‘백(白)’은 우리말로 ‘밝’ 혹은 ‘배’로 쓴다는 것이 정설이고, 산(山)의 고어는 ‘달(達)’입니다. 따라서 태백산은 ‘한배달’이라는 우리말을 한역(漢譯)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을 백산민족, 즉 배달민족이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호도 백산(白山)이라고 지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환인께서 이 태백산에 아들 환웅을 보내죠? 내려보낼 때 삼천 명 무리를 이끌고 가게 했다고 하는데, 삼천 명 가운데 풍백, 운사, 우사를 앞세우고 옵니다. (이 때 풍백을 앞에 놔야 됩니다. 바람이 불어야 구름이 움직이고 그 다음에 비가 오게 되어 있어요.) 그들을 데리고 와서 태백산에 나라를 세웠단 말이죠.
 
 그리고 서울을 평양으로 옮겼습니다. 수도를 평양(아사달)으로 옮겼다는 기록은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나옵니다. 이 내용은 『위서』라는 중국 위나라의 사서를 인용한 겁니다. 그러니까 이 내용은 확실한 건데 이걸 ‘가짜다’ ‘위서다’라고 몰아세운 게 일본 사람들이고, 또 우리 유학자들은 단군까지만 인정하고 단군 이전의 역사는 안 된다고 해서 부정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단군 이전에 환인, 환웅이 계셨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개천절이라고 하면 단군이 개천한 것으로 알고 있죠. 하지만 『환단고기』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느냐? ‘환웅이 개천했다’ 이렇게 나옵니다.
 
 
 잊혀진 단군, 되살아나는 단군
 우리 나라에는 ‘묘향산의 비기(秘記)가 지리산에서 나왔다’ 하는 식으로 이 비기라는 것이 많은데 그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 바로 신지가 지은 『신지비사(神誌秘詞)』입니다. 이 책을 남긴 신지(神誌)라는 분은 단군시대 역사가이면서 요즘으로 말하면 나라의 모든 행정을 맡았던 분입니다.
 
 이런 비기들이 후대에 많이 발견되었는데, 이런 비밀스러운 기록들이 발견되면 유학자들이 다 찢어버렸어요. 5백년전 조선 왕조가 시작될 무렵에 이성계가 정권을 잡으면서, 유학자들이 주자학이 아닌 다른 문서는 전부 태워버렸습니다. 그리고 또 일제가 쳐들어와서는 단군에 대한 얘기가 쓰여진 책을 전부 몰수해서, 서울 남산 뒤에 있는 총독부 뒷마당에서 태웠습니다. 제가 일본에 갔을 때 당시 담당자를 만났는데, 들어보면 일주일 내내 태웠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 미국에 갔더니 미국 교포들 얘기가 중국사람들이 그런다는 겁니다. “한국에 무슨 문화가 있느냐? 문자도 우리 한자(漢字), 남의 글 가지고 빌어쓰고 있는데 한국에 독자적인 문화가 뭐가 있느냐?” 중국 사람들이 소위 중화사상이라는 것이 있어서 우리 한국을 얕잡아보고 그런 말을 합니다.
 
 하지만 삼천포 남쪽에 남해섬이란 데를 가면, 그곳에 우리 나라의 고대 문자로 추정되는 ‘남해각서’가 있습니다. 가서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탁본을 해 갔는지 바위가 새까맣게 먹물에 젖어 있어요. 위당 정인보는 “우리 나라의 문자는 옛날부터 있었다. 지금 남해현 낭하리의 암벽에 신시(神市)의 고각(古刻)이 있다.”고 쓰고 있는데, 이 남해각서를 근거로 단군시대에 우리 나라의 고유 문자가 있었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또 이맥(李陌)의 『태백일사』「소도경전 본훈」에는 “한문이 우리 나라에 들어오기 전에 가림토(加臨土)라는 옛 글자가 있어 모두 이 문자로 기록을 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가림토 문자를 만든 분이 바로 신지(神誌)로 알려져 있습니다.
 
 많은 역사서들이 소실된 안타까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이런 유산들이 남아 있다는 건 정말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 글자는 국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 조상의 얼과 혼이 다 들어 있으니까요.
 
 저는 그런 자긍심을 가지고 단군께서 남기신 문화가 뭐냐 하는 것을 찾아서 뒤를 밟았습니다.
 
 
 

 천지인을 함께 받든 제사의식
 우리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천제(天祭)입니다. 이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겁니다. 또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문화가 있고, 용신과 농신 등의 농사를 도와주는 땅의 지신에게 제사 지내는 문화가 있습니다. 그러한 천지인 세 가지, 이게 바로 삼신(三神)입니다.
 
 모든 종교가 일신이지만 우리의 전통 종교는 다신교, 삼신교였습니다. 또 삼신이라고 하면 환인·환웅·단군 이렇게 세분으로도 얘기를 합니다.
 
 강화도 마리산에 올라가면 참성단이 있죠. 참성단은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제천단인데, 지금도 10월 3일이 되면 마리산 참성단에서 제사를 지냅니다. 근대의 강화학파 이건창이 남긴 글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참성단은 강화 마리산에 있으니 단군 왕검이 재위 51년(BCE 2282년)에 산을 깍아 성단(成壇)하고 돌을 쌓아 지어 올렸다. 높이는 17척이요, 모양은 위가 모나고 아래가 둥근 상방하원인데 바로 단군이 제천하던 곳이다.”
 
 하늘을 받드는 제천에는 원단을 쌓지만, 지신(地神)을 모시는 제지(祭地)에는 네모 난 언덕을 쌓는 것이 삼한의 풍속이었습니다. 그러니 마리산 참성단은 제천·제지의 두 기능을 다하고 있는 셈입니다.
 
 김구 선생도 해방이 되고 제일 먼저 참성단에 와서 절을 했는데, 요즘은 대통령이나 누가 여기를 갑니까? 안가죠. 단군을 모르니까 그런 겁니다.
 
 
 제천의식의 자취, 소도(蘇塗)
 단군문화의 핵심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천신제(天神祭)인데, 제천의 기본 원리가 삼신신앙입니다. 환인이 환웅을 지상에 내려보내 웅녀와 결혼해 단군을 낳았다고 하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삼신신앙의 원형을 간결하게 서사화한 것이라 볼 수 있죠. 환웅이 강신(降神)할 자리로 선택한 곳이 태백산이고, 그래서 산에서 제를 올리는 의식이 시작되었습니다.
 
 산에서 올리는 제천의식의 자취가 남아서 지금까지 전해진 것이 소도(蘇塗)입니다. 황해도 구월산에는 환인·환웅·단군을 모신 삼성사(三聖祠)가 있는데, 그 입구에 소도동이란 마을이 있습니다.
 
 한자로 소도동(所都洞)이라고 썼는데, 곧 ‘단군이 이곳에 도읍하였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 태백산에도 소도동이 있는데, 산을 오르려면 이 소도동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이 소도동에서 태백산으로 올라가는 골짜기를 당골이라 하는데, 단군골이라는 뜻입니다.
 
 소도동에서 당골로 들어서면 그곳에 단군성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정인보는 “여러 나라에는 각각 별읍이 있으니 그 곳을 소도(蘇塗)라 한다. 소도에는 큰 나무를 세워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라고 기록된 『삼국지』「동이전 한조」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 소도를 천제 올리는 성역으로 보았습니다.
 
 소도란 즉 성역화된 산 또는 제단에 돌을 쌓아 치성을 들이는 곳입니다. 전국적으로 이렇게 돌을 쌓아서 치성을 드리는 곳이 굉장히 많이 있어요. 성소에다 돌을 던져 경배하는 습속은 뒷날 돈을 던져 경배하는 형식으로 바뀌게 되는데, 현재는 이것이 병행되고 있습니다. 이 소도는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웬만한 산에는 다 남아 있습니다.
 
 또 소도는 우리 민속에서 말하는 솟대로도 나타납니다. 솟대는 천신이 강림하는 신단수를 상징한 성물로서 목간, 장승, 적석, 입석 등 종류가 다양한데, 이들 모두가 소도에 해당합니다. 이것은 하늘과 관계가 있는 그러한 단군문화의 하나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서낭당에 모셔진 웅녀
 현재 우리나라 각지의 마을에는 단군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인 서낭당이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습니다. 강릉에도 가면 서낭당이 있는데, 그 서낭당에 누굴 모셨느냐. 놀랍게도 웅녀를 모셨습니다. 안내하는 사람은 웅녀라고 하지 않고 고려 왕건의 부인이라고 얘기를 하는데, 웅녀로 보는 게 맞습니다.
 
 흔히 서낭당을 성황당(城隍堂)으로 표기하지만, 우리나라 서낭당은 중국의 성황(城隍)과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성황’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서낭당 또는 선왕당(先王堂)이라고 표기하는 게 맞습니다.
 
 선왕(先王)이란 본시 환인과 환웅, 단군 등 삼신(三神)을 일컫는 말이죠. 그렇다고 하면 서낭당에 모신 여신은 웅녀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서낭당 옆에는 반드시 당목이 서 있습니다. 이것은 신단수가 그 원형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일연은 『삼국유사』「고조선조」에서 신단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환웅이 그의 무리 3천 명을 이끌고 태백산정 신단수 아래 내려와 신시(神市)를 열었으니 이 분이 환웅천황이다.” “웅녀는 그와 혼인해 주는 이가 없으므로 항상 신단수 아래에서 아기 배기를 축원하였다.”
 
 이로 볼 때 환웅의 신단수가 후대의 당목 내지 단목 또는 서낭목의 원형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웅녀와 환웅 사이에 단군을 낳게 해 준 신성한 나무가 바로 신단수요 서낭목인 것입니다.
 
 경주 박물관에 가면 신라 임금님의 관이 있죠. 이 관이 한자의 출(出) 자를 닮았다고 해서 이름을 출자형이니 이렇게 얘기하는데, 사실 이건 신단수를 형상화한 겁니다. 말하자면 임금님의 권위가 하늘에서 오는데, 환인·환웅·단군의 역사와 관련된 신단수를 머리 위에 썼으니 누가 감히 대적하겠느냐 하는 뜻입니다. 최고의 권위인 하늘을 상징하는 것이죠.
 
 
 단군 탄생을 기념하는 축제, 강릉단오제
 천신제의 본질은 하늘의 신을 지상으로 불러 내리는 강신제이므로, 천신인 환웅의 강림을 축원하는 의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의식으로 천신이 먼저 신단수나 신대에 강림하게 되고 강림하신 천신을 지상의 웅녀가 맞아들여 아들 단군을 낳게 되는 것이 대략의 절차인데, 현재 그 절차는 지역에 따라 여러 형태로 변형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천신제 가운데 그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것이 저는 ‘대관령 산신제’라고 생각합니다. 대관령 산신제는 강릉단오제에 맞춰 음력으로 4월 15일에 치러지는데, 단오제 축제의 절정이 바로 5월 5일 단오절에 맞춰 대관령 산신을 모셔오는 의식이 대관령 산신제입니다.
 
 대관령 산신제를 할 때는 제사를 지내고 굿을 하면서 춤추고 북을 막 칩니다. 그러면 바람이 불어서 나뭇가지가 흔들려요. 여러 나무 가운데 제일 많이 흔들리는 놈을 무당이 가져와라 해서 옷을 입힙니다. 이걸 신대라고 하고 여기에 울긋불긋한 때때옷을 입히고서 서낭당으로 데려 오는데 이건 남자, 즉 환웅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이 환웅을 모시고 웅녀가 기다리고 있는 서낭당에 가서 합방을 하게 돼죠. 그 뒤 21일이 지나면 5월 5일 단오를 맞게 됩니다. 이는 합방을 하고 21일, 즉 3·7일 후에 단군이 탄생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단오제’는 ‘단군 탄생의 날을 기념하는 축제’가 되는 거죠. 환웅이 웅녀를 찾아 합방한다는 강릉단오제의 줄거리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설화를 충실히 재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놀이와 민간풍속에 남은 단군문화
 현행 각종 민속놀이의 시원은 모두 천신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아무 제사도 지내지 않고 놀이만 하는 그런 행사는 없어요. 줄다리기와 탈놀이가 그 대표적 사례인데, 줄다리기에서 신목을 베어다가 비녀목으로 사용한다든지 동군과 서군이 남·여를 상징하고 있어 남군이 여군에 져 주어야 풍년이 든다든지 하는 전설 따위가 그 좋은 예입니다.
 
 또 양주 별산대 탈놀이에서 가장 원시적인 남녀 한 쌍의 탈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살펴보면 그 연유가 환웅과 웅녀의 만남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수레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우리 한국인 특유의 생활풍습인데, 음식을 먹기 전에 그 첫 술을 땅에 뿌리는 풍습을 말합니다. 이 때 실제로 ‘고수레’라 소리 지르면서 음식을 뿌리죠. 이 고수레도 단군과 연관이 있습니다. 김교헌은 『신단실기』에서 고수레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농가의 농사꾼들이 밭을 갈다가 점심을 먹을 때면 반드시 먼저 한 숟갈을 떠내고 빌기를 ‘고시레’한다. 단군 때 고시(高矢)라는 사람이 밭과 땅을 맡아 백성들에게 농사를 가르쳤기 때문에 후대 사람이 그 근본을 잊지 않고 먼저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단군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 중에 또 산목(算木)이라는 게 있습니다. 산목은 산대라고 부르는 게 통례인데, 중국에서 주판이 전래되기 전에 우리는 이 산대를 가지고 계산을 했습니다. 저도 이 산대를 하나 갖고 있는데 어떻게 계산하는가에 대한 간단한 해설서도 있어요. 이 산대는 주판보다 빠르고 요즘의 전자계산기보다도 빠르다고 합니다.
 

 
 단군과 그 아들을 기린 문화
 단군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부루가 첫째요, 부소가 둘째요, 부우가 셋째요, 부여가 막내입니다.
 
 『규원사화』를 보면 2세 단군에 즉위했던 첫째아들 부루가 재위 58년만에 세상을 떠나자 ‘만백성이 심히 슬퍼하여 집안에 부루단지(夫婁壇地)를 쌓아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지금은 사전에도 잘 나오지 않는 낱말이 되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집집마다 모셨던 우리의 오랜 가신이자, 장독대와 터줏대감의 원형이 바로 부루단지입니다. 부루단지는 최근 주택이 근대화되고 아파트가 늘어나면서 거의 사라졌고 부루가 누구라는 것도 잊혀졌습니다. 그러나 ‘단지’라는 말은 아직 남아 있죠.
 
 부루단지의 단지란 햅쌀을 담아서 부루에게 감사 드렸던 항아리를 경상도에서 가리키는 말입니다. 또 단지가 있던 곳이 장독대인데 장독대야말로 주부가 가장 중시하는 곳입니다. 단지를 두는 곳이기 때문이죠.
 
 『규원사화』에는 또 둘째아들 부소가 불을 피우는 방법을 개발해 부싯돌이란 말이 유래되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부소는 신시시대의 고시씨가 발명한 발화법에 따라 마른 쑥에다 쇠와 돌을 쳐서 불을 만들었다. 지금도 불을 붙이는 도구로 쇠와 돌, 그리고 마른 쑥을 쓴다. 이 세 가지 도구에는 반드시 부소라는 이름을 붙여 쇠를 부싯쇠, 돌을 부싯돌, 쑥을 부싯깃이라 부르고 있다. 이는 모두 부소씨의 공을 기리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고 기록하고 있죠.
 
 댕기나, 금줄 등도 단군과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단군은 특히 어린이를 보호해 주는 분으로 믿어 왔는데, 댕기라는 말은 단계(壇戒) 또는 단기(壇祈), 즉 단군사당에 가서 빌었다는 데서 유래된 말입니다. 또 아이를 낳았을 때나 잡병을 쫓을 때, 신성한 영역을 나타낼 때 사용해 온 금줄은 원래 검줄이 와전된 것으로 검줄은 단군왕검 즉 ‘임검(壬儉)의 줄’이란 뜻이죠.
 
 
 산신각과 대웅전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나라를 세운 민족이라 그런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존심이 강합니다. 나라는 별로 부유하지도 않으면서도 굉장히 자존심이 강해요. 그래서 유교, 불교 등 외래 종교가 한국에 들어오면 모두 한국화가 됩니다.
 
 중국의 유교하고 우리나라의 유교가 180도 다르고, 불교도 한국에 들어오면 한국에 귀화해서 부처님의 불교가 아니라 한민족과 한국을 위한 그런 종교가 돼요.
 
 우리 나라 방방곡곡에 불교 사찰이 있어요. 하지만 우리 민족의 고유 종교는 신교, 즉 단군교입니다. 그래서 고구려나 백제, 신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는 모진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나라 절에는 반드시 산신각(山神閣)이 있어야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 불교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절에 산신각이 있어야 하는가. 제가 이 사실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 건 아주 오래 전 일입니다.
 
 식구들을 데리고 한탄강에 놀러 간 적이 있었는데, 강변에 작은 사찰이 있는 걸 보고 찾아갔습니다. 지은 지 얼마 안된 작은 절이었는데 일주문이나 사천왕문도 보이지 않고 단지 대웅전 하나만 외롭게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대웅전 앞마당에 작은 석고 단군상이 있는 겁니다. 그리고 단군상 앞에 촛불을 켜놓고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절에 단군상이 모셔져 있던 이유는 산신각을 지을 돈이 없어서 임시로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이처럼 ‘단군이 곧 산신’이라는 생각은 불교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통념화되어 왔습니다.
 
 대부분 절이 대웅전과 여러 부속 건물이 있는 경내에 산신각을 모시는데, 김천 직지사를 갔더니 거기는 산신각을 따로 분리시켜 놓았습니다. 그리고 산신각에 들어서니 특이하게 삼성각(三聖閣)이라 쓴 액자가 보였습니다.
 
 저는 그 때 즉각 산신각의 원명이 삼신각(三神閣)이구나 하는 걸 직감했습니다.
 
 또 대웅전이란 이름도 한국에만 있는 명칭인데, 그 어원을 따져보면 환웅전이 대웅전이 된 겁니다. 『태백일사』「신시본기」에 보면 “불상을 처음 한국에 들여와 절을 짓고 대웅전이라 하였다. 이는 스님들이 전례를 답습하여 옛날 그대로 환웅전을 빌려 쓴 말이요, 본래는 승가의 말이 아니었다.”고 기록된 것에서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
 
 환웅은 단군의 아버지요 천신인 환인의 아들인데, 이 삼신을 믿고 살아 온 우리에게 손님 신인 부처가 들어와서 자리를 빼앗았으니 이름이라도 한(환)웅전으로 살려준 것입니다. 한(환)은 크다는 뜻이니 이를 ‘큰 대(大)’자를 써서 대웅전이라고 한 거죠.
 

 
 잃어버린 정신과 얼을 되찾아야
 옛사람들은 혼을 중시하고, 정신을 중시했는데 지금은 정신 빠지고 얼이 빠진 시대가 너무 오래 지속되고 있어 걱정스럽습니다. 옛말에도 ‘시작을 모르고 어찌 그 끝을 알겠는가’ 하는 경구가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는 엄연히 시작이 있습니다. 그런데 단군을 빼고 그 시작을 얘기하면 우리의 끝이 뭔지를 몰라요. 우리 사회가 어떤 사회로 가야 되느냐 하는 그 목적을 모른다는 겁니다.
 
 한 배를 탄 사람들은 공동의 목적을 갖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이 모든 사람들에게 가치가 있어야 됩니다. 역사속에는 종교, 철학 등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바로 아는 것은 실로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단군을 얘기한다고 해서 혹자는 무슨 국수주의니, 파시즘이니 여러 나쁜 얘기들을 하지만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단군의 가르침이 홍익인간인데 이건 세계적인 철학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도 단군을 연구해야 됩니다.
 
 오늘날 인문학을 무시하고 과학기술이 인간을 좋은 데로 선도할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만, 이미 식자들은 이런 물질문화가 인류에게 파멸을 가져올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만 아는 게 아니라 서양 사람들도 알고 있습니다.
 
 나는 문화는 정신문화, 역사는 정신의 역사여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 역사가 어디로 가야 하느냐, 우리가 탄 배가 어디로 가야 하느냐? 결론은 바로 단군으로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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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수 교수-사학자. 전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실장
 

ⓒ증산도 본부, 월간개벽 2007.0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