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세기 동안 전세계적으로 수메르인에 대한 연구는 비상한 관심을 모아 왔다. 그 주된 이유는 수메르인들이 이처럼 인류사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 나날이 새롭게 발견되고 있는 점에 있다.
 특히 수메르인들의 종교문학과 의식이 오늘날 서양 문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에 상당한 영향을 남겼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학계는 물론 일반인들의 관심도 더욱 높아지고 있다.
 
 
[수메르의 위치]
  기원전 3500년경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한 무리의 인간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거기에 정착하기 시작한다.
  이 한 무리의 인간들을 '수메르인 Sumerian'이라고 하며 그 뜻은 '검은 머리' (Black Headed People)라는 뜻이다.  크래머 같은 학자들은 주위에 원래 없던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나 살았다고 하여 '인종의 섬'이라하는 표현을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양강 지역에 올 때 문자와 학교제도와 법제도 등 고급문화를 이미 가지고 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도대체 어디서 있다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이주해 왔느냐이다.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남겨져 있는 이 수메르인들의 유래 문제를 소위 '수메르 문제 거리 Sumer Problem'라 할 정도이다. 나일강 유역의 이집트문명도 수메르보다 무려 1000년 이후의 것이며, 인도의 인더스강 유역 문명도 그와 비슷한 후기 문명이다.
  수메르인들이 가지고 온 문명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급문명으로, 그 당시 지금의 히브리인들은 말 그대로 'Habiru'로 그 말의 의미는 '떠돌이' 혹은 '산적'의 의미 등을 갖는다.
 
 
<환단고기에 등장하는 수밀이국>
  우리 한(桓)의 건국은 가장 오랜 옛날에 있었다.... 어느날 동남동녀(童男童女) 800명이 흑수와 백산의 땅에 내려 왔다. ... 이를 한국(桓國)이라 하고 그를 천제한인(天帝桓因)이라 했으며 안파견이라고도 불렀다. 7세를 전하였는데 그 역년은 3,301년이라 한다.
  그 땅의 넓이는 남북 5만리 동서 2만여리에 이른다. 이를 모두 합하여 한국이라 하며 나누어 말하며 비리국, 양운국, 구막한국, 일군국... 선비이국, 수밀이국으로 보두 12국이다.  
                                                                          <한단고기 삼성기(三聖記)>
 비리국은 숙신의 서북쪽에 있는데 말을 타고 200일을 가야 한다. 양운국은 비리국에서 말을 타고 또 50일을 가야 한다. 구막한국은 양운국에서 또 100일을 가야 하며 일군국은 구막한국에서 또 150일을 가야 하는데 이를 계산해 보면 숙신에서 5만여리를 가야한다.  
                                                                    <당나라 때 편찬된: 진서(晋書)> 

<수밀이국의 대이동>
그러면 천산(파미르고원)과 바이칼호 근처에 있던 <수밀이국>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 이주하게 되었을까?
이것은 환국말기인 약 6천년전에 인구가 증가하고 기상이변으로 시베리아 지역이 점점 추워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12환국의 한 갈래가 성지 태백산(백두산)으로 이동하여 환국의 정통을 지켜내려온 것(환웅의 배달국)이 바로 오늘날의 한민족이다. 이제 그 환국의 대이동 경로를 따라 갈라져 나가 오늘날 여러 민족의 뿌리가 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수메르인들의 유물 발굴
  수메르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문명화된 땅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로선 (그 주위에서) 수메르가 최고 발달된 문명이었기 때문이다.
  수메르의 도시는 상하수도 시설도 갖추고 있었고 심지어 수세식화장실도 이용했다. 이집트문명도 수메르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더 나아가 바빌론과 그리스 문명도 수메르의 영향을 받았으니...
  수메르인들이 설형문자라는 것을 사용할 당시 히브리인들은 문자도 없었으며 옷이란 동물 가죽을 벗겨 입고 다닐 정도였다. 그리고 수메르인들은 직조기술을 발견하여 이미 옷을 물들여 입고 다녔다. 건축술도 발달하여 2층 가옥을 지을 정도였다.
 
 
지구라트
  수메르인들이 발전시킨 농경기술은 점차 유목과 수렵생활을 대체해 나가면서 원시 상태에 있던 인류의 생활을 풍족하게 해주었다. 최초로 도시를 건설한 수메르인들의 건축 기술은 후대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수메르 신전 지구라트(Ziggurat)는 지금도 그 웅대한 자태를 보존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 후 중동 각지에 세워진 신전 양식의 전형이 되었으며, 성서에 나오는 바벨탑의 모델이 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수메르인들이 만든 사회제도와 관료제도, 법률 등도 후대의 제국들에 그대로 차용되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기록된 인류 최초의 법률 역시 수메르인들이 만든 것이다.
  이밖에 수메르인들의 종교적 관념과 의식 등도 주위 민족들에게 큰 영향을 남겼다. 마치 로마가 그리스의 신들을 수입해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듯이 바빌론과 아시리아제국의 신들은 수메르 신들이 그대로 들어와 이름만 바꾼 것들이 많았다.
 
 
홍수설화 등 기독교의 원형을
수메르 토판에서 찾아볼 수 있다.
 
 1830년대 처음으로 이라크에서 수메르 문자가 발견되면서 가장 충격을 받은 곳은 기독교였다.
   왜냐하면 가장 최초의 사건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생겼을 것이라 여겨져 왔고 에덴동산도 그 지역 어딜 것이라 믿어 오던 터에 창세기의 창조설화와 홍수 설화 등이 수메르의 토판 속에 그대로 그 원형이 기록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수메르인들과 유태인들은 어떤 관계에 있었을까?
  
기록에 따르면 유태인들의 조상은 수메르 지역에서 유목 생활을 하며 떠돌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뒤에서 수메르의 역사를 소개할 때 자세히 알 수 있겠지만, 수메르인들이 도시를 만들고 문명생활을 누리고 있을 때 그 주위에는 유목 생활을 하는 다수의 야만적인 민족들이 있었다.
  그 중에는 셈족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고 이 셈족이 바로 오늘날의 유태인과 아랍인들의 원형인 것이다.

  
 
 
정리하면 수메르문화가 고대 중동세계에서 보편 문화의 역할을 하고 있을 때 이들 주위에서 떠돌던 유목민족의 일파였던 유태인들이 수메르 문화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충분히 높고, 이에 따라 유태인들이 만든 성서에서 수메르적 요소가 발견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