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에 대하여 전멱적으로 사료적 가치를 부정하는 사대식민사학자들에게 개인 이익이나 떼거리 이익에 집착하지 말고 하나의 평화세계를 향해 마음을 열어 민족국가역사를 복원할 떄라는 것을 상기 시키며 그 들의 주장을 유지하려면 다음 23가지 실증사례에 답해야 하며, 그렇지 못할 때에는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겠다. (여기서 [아! 고구려]의 저자 허성정 씨와"천부인과 천부경의 비밀"의 저자 구길수 씨의 일부 학설을 받아들여 통합한서 것임을 밝혀 둔다.)

첫째 환단고기에 단군조선13세 흘달(屹撻) 단군 50년(서기전1733)"5성취루 五星聚婁라고 하여 5개의 별이 루성 중시므로 모이는 장관이 연출 되었다 했는데, 잉것이 천문학자인 서울대 박창범교수와 라대일 박사 등에 의하여 과학적 방법으로 증명된 것이다.

박교수는 '환단고기'와 '단기고사'는 발해의 대야발이 편찬했으나, 일부 사대식민사학자들은 과학적 검증 없이, 삼국사기 전인 것과 후대의 조작 흔적이 있다는 것을 내세워 무조건 위서로 몰고, 외면하여 진지하게 연구조차 하려 들지 않았다.

서울대학교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는 이를 딱하게 여기어 두 책에 기록된'5성취루', '일식' 등의 현상이 당시에 실제로 존재했었는지를 천문학적으로 연구, 검증했다.

박창범 교수는 특히 두 책에 모두 기록된 '5성취루'현상에 주목하여 추적 조사한 결과, 실제로 서기전 1734년 7월13일 일몰 직후 금성,목성, 토성, 화성 그리고 추가로 초승달까지 일렬지어 하늘에 나타나는 장관이 연출됐음을 확인하였다.

박창범 교수는 "이같은 현상을 우연히 맞출 확률은 0,007%에 불과하며, 책의 조작 여부에 관계없이 역사적인 사료로서 가치가 있다"고 확인했다.([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이것은 우리 민족 문화사 가운데, 상고사를 질증적 규명단계로 진입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단군 조선이 민족국가로서 높은 수준의 문화를 창조했음과 더불어 환단고기의 실체를 입증한 것이라 사료된다.

둘째 환단고기 등장 이전에는 밝혀지지 않았던 발해 3대 문왕 대흠무의 연호가 환다고기에'대흥 大興'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서기 1949년 중극 길림성 화룡현 용두산에서 출토된 정효 공주 묘지 비문에서 문왕 대흠무가 자기 존호를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 大興寶歷孝感金輪聖法大王'이라 하고 불법의 수호자로 자처한 데서 드러나, 환단고기가 사료로서 가치가 있음이 과학적으로 실증되었다.

셋째는 고구려 유장 이정기가 중극 중동부 15개 주에 대제(大濟,평로치청)라는 큰 나라를 세우고, 4대 58년간 다스린 기록이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 본기에 처음 나오는데. 이것도 1997년 처음으로 발간된 책<고구려를 위하여>(김병호, 하서출판),그리고 KBS역사 스페셜 '중국 속에 또 다른 고구려가 있다, 이정기 왕국(2001.5.16)'에서 역사적으로 확인되었따.

넷째 강화도 마니산에 제천단 참성단이 있어 역사적으로 각 왕조마다 해마다 천제를 지내온 바, 그 첫 기록이 환단고기 단군세기 단군왕검 무오 51년(BC2282년)에 쌓았다는 것이 나온다, 마니산 참성단은 지금도 의연히 그 자태를 빛내고 있으며, 서울 올림픽, 월드컵추국와 전국체전 성화채취의 기볹성지가 되고 있다. 강화도에서는 이 밖에도 고저선 유물로 정족산성과 고인돌 127기가 있다.

다섯째 단군조선의 실재를 보여 주는 것으로, 평양 강동현에 있는 대박산에 단군릉이 1993년 발굴되었따. 여기에서는 왕과 왕후로 보이는 유골이 발견되었으며, 북한은 단군릉을 거대하게 개건하여 성역화하였다. 그리고 1926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모금운동을 하여 평양 강동현 단군릉을 보수하고 해마다 제사를 올린 바도 있다.

여섯째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에는 장스왕이 즉위하자,'건흥 建興'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기록이 보인다. 건흥 연호는 1915년 충북 충주 노온면에서 출토된 불상의 광배명 光背名에서 나타나고 있따. 이 고구려 불상에는 '건흥오년세재병진建興五年歲在丙辰'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한때 백제 불상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광개토대왕릉비>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은 임자년인 412년에 사망하게 된다. 즉위년 칭원법에 따라 이 해를 장수왕 즉위 원년으로 삼아 본다. 그러면 장수왕 즉위 5년은 병진년이다. 따라서 병진년 불상 광배병과<태백일사>를 통해 '건흥'이 장사왕 대의 연호라는 새로운 지견을 추가할 수 있게 된다.

일곱째는 환단고기 태백일사에는<조대기朝代記>를 인용하여 연개소문의 아버지 이름은 태조 太祚 , 할아버지는 자유 子遊, 증조부는 광 廣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 가운데 연개소문의 할아버지와 증조부의 이름은 <태백일사>를 제외한 어떠한 문헌에도 나타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1923년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서 출토된 연개소문의 아들 천남생의 묘지에서 천남생의 증조부 이름을 '자유'로 명기하고 있어서 <태백일사>의 진가가 드러나게 되었따.

여덟 번째는 환단고기 태백일사에 <진역유기>를 인용하여 현재 태국에 있는 아유타국과 백제 상인이 교역한 기록이 남겨져 있다. 이는 지역적 근접성으로 보아 백제가 현대의 캄보디아인 부남국扶南國과 교역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뒷받침해 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백제 해외경영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아홉 번째는 실증사학을 내세운 사대식민사학의 거두 이병도 박사가 과거에는 단군을 신화로 몰다가. 친구인 재야사학자 최태영 박사와 국사찾기 협의회원들(김세환,박창암씨 등)의 우정 있는 충고를 받아들여 참회하고, 단군은 실존의 우리 국조이며, 역대와조가 단군제사를 지내왔으나 일제 때 끊겼고, 삼국사기 이전의 환단고기 등 고기의 기록을 믿어야 한다고 1986년 10월9일자 조선일보 1면 머리기사에 쓴 사실이다.

단군조선의 사실史實과 환단고기를 믿으라고 쓴 것이다. 사대식민사학자들은 그들 태두의 말을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열 번째 환단고기가 위서라면, 실증적 입장에서 깊이 연구하여 6학원칙에 입각하여<누가, 엉ㄴ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위조했는지 명백시 제시해야 하는데, 이를 제시한 사람이 현재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열한 번째는 갑골문의 귀방이다. 은나라의 갑골문에서도 환단고기 단군세기의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유물,유적이 발견되었다.즉 BC1291년 단군조선 제21대 소태단군 재위 때 은나라 왕무정이 '귀방을 '쳤다는기록이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 남아 있는데, 과연 은나라읭갑골문에서 은나라으 ㅣ구ㅏ방 정복 사실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서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이다. 환단고기는 이토록 확실한 역사적 근거와 고고학적 근거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열두 번째는 비파형동검이다. 단군조선의 비파형동검은 단군조선이 지나와 구별되는 선진 청동문화를 가진 정치세력 집단이었음을 가장 단적으로 나타내는 대표적인 유적.유물이다. 이 정치집단의 분포도는 환단고기가 말하고 있는 역사적 시기와 역사적 강역이 너무도 일치하는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비파형동검의 분포지는 만주, 한반도, 중국대륙의동편으로 환단고기가 설명하고 있는 역사 강역과 완전히 일치하며 그 연대도 완전히 일치한다.

열세 번째는 고인돌 유적이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가 설명하고 있는 고인돌에 대한 기록 또한 환단고기의 사료가 치성을 유적유물로 뒷받침하는 단군조선의 실증적

증거물이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에는 배달국 신시시대의 장묘문화부터 고인돌시대 장묘문화와 삼국시대의 장묘문화까지를 기록하고 있다.환단고기는 이와 같이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의 실상을 연대기와 역사기록과 역사 강역을 정확히 표시하고 있는 아시아의 대표적 역사서이다.

 

열네 번째는 하북성 중산의 천자명문이다. 하북성 중산묘에서 BC10세기 것응로 보이는 청동도기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엔느 '천자건방중산후'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단군 조선의 핵심강역인 서요하지역에서 출토된 BC22세기부터 BC10세기까지 북경과 하북성 일대를 다스린 것은ㅇ 단군조선의 천자였음을 기록한 환단고기의 기록을 그대로 뒷받침하는 것이다. 자나인들이 최초로 천자(황제)를 참칭한 것은 BC 221년의 진시황이었다.

 

열다섯 번째는 요녕성의 '번한'명문이다. 요녕성 대집둔 지구에서는 환단고기가 기록하고 있는 단군조선의 제후국 번한(번조선)의 명문이 나타나 환단고기의 사실성을 증명하고 있다. 요녕성 대집둔 지구에서는 번한 番汗을 낱내는 '번한'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은 도장이 발견된 것이다. 단군조선은 개국과 동시에 진한(요하지역)과 번한(황하,하북성)과 마한(한반도/만주)등의 삼한(삼조선)으로 나누어 다르렸다는 환단고기의 기록을 그대로 뒷받침하는 유물, 유적이 출토된 것이다.

 

열여섯 번째는 남녀 조각상과 곰 석상이다 서요하 지역의 적봉시 나사대 지역에는 환웅과 곰을 ㅌ  ㅗ템으로 하는 부족의 곰녀를 상징하는 나면조각상과 곰  석상이 출토되었따. 서요하 지역의 적봉시 흥산유적지에서는 갑골문의 초기형태가 발견되어 은나라의 갑골문이 홍산문화 담당자들에 의해 전해졌음을 밝히고 있다. 이 흥산문화와 나사대 문화는 대체적으로 배달국 시대(BC3898년과BC2333년 사이)와 일치하고 있다.

 

열일곱 번째는 배달국의 녹도문과 창성조적비 이다. 환단고기에는BC3898년18분의 환웅 중 배달국을 건국한 제 1세 거발환 환웅께서 신지에게 녹도문을 창안할 것을 명하고 , 배달국의 겨사기록을 담당시킨다. 그런데 이 녹도문이 한국의 평양에서도 발견되었고, 산동성의 창성조적비에서도 발견되었다. 평양의 녹도문과 창성조적비의 글씨는 모양과 혀태가 배달국의 녹문임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환단고기의 사료가치성이 이렇게 높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열여덟 번째는 기림토문과 일본의 신대문자이다. 환단고기에는BC2181년 제3세 가륵단군이 울보록에게 정음 38자를 창제할 것을 명한다. 그런데 이 가림토문이 흔적은 지금의 한글에 그대로 남아 있고, 일본의 신대문자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 일본 '구주신가'의 가림토문 비석이나'세신궁'의 가림토문 청동거울은 한글 비석과 한글 청동거울이라 명명하면 딱 들어맞을 정도로 완벽한 가림토문이다. 또 스리랑카 패엽경사 바위글과 인도의 구자라트 문자 역시 그 형태와 내용이 한글 (가림토문)과 흡사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열아홉 번째는 요하는 압록이고 낳나는 요하란 것이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는 지금의 압록강은 '동압록'이고, 지금의 요하가 '압록'이고 지금의 난하가요수(요하)'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요하가 압록이란 사실은 중국 요사리지리지와 함국유사도 정확히 기록하고 있따 .지금의 요하가 압록이고 지금의 난하가 요수임은 서토의 고지도 '지리도' '연산도' '중국삼대간룡총람지도'에도 나타나 있따. 환단고기가 얼마나 정확한 기록을 반영한 역사서인지를 증명하고 있다.

 

스무 번째는 낙랑군과 낙랑국이다.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와 북부여기는 낙랑군과 낙랑 국에 대한 근거를 가장 명확히 설명하고 있따. 낙랑이란 지명이 나타나는 것은BC 1767년 제13세 흘달단군,BC1237년 제23세 아흘단군, 그리고BC195년에는 낙락왕 최승이 보물을 싣고 마한의 서울왕검성으로 가는 장면이 적혀 있다. 이때부터 하북성의 낙랑군과 한반도의 낙랑국이 구분되어 나타난다. 환단고기는 고대사의 비밀을 푸는 열쇠이다.

 

스물한 번째는 단군조선 12세 아한단군 때 가림토로 추정되는 순수관경비를 세워 역대 제왕의 이름을 새겼다는 내용이 환단고기 단군세기와 단기고사에 나오는데, 엄청난 시차를 두고 사항을 기록함에 위작을 했을리 엇ㅂ는 것이다. 단기고사에는 아한단군과 유위자 선인의 먼 국가장래에 관한 대화속에 "사방국경에 제왕의 명호를 본국의 문자로 비석에 새겨 국문을 영원히 보전케 하시니라"거 기록되어 있다.

환단고기 단군세기에는 아한단군 52년( BC1833) 4월 외뿔 가진 짐승이 송화강 북쪽에 나타났다. 추 8월 천제께서 나라 안을 순시하시고 요하 좌측에 이르러 관경순수비를 세웠는데., 여기에 역대 제왕의 명호를 새겼는데 이것이 가장 오래된 금석문이다.

 

스물두 번째는 환단고기에 원형 한글을 같은 의미로 가림토加臨와 가림다 加臨多라고 하는 표현이 있는데 단군세기의 가림토나 태백일사의 가림다느 ㄴ각기 다르게 전해져 오는 기록들 가운데 이암은"가림토"(행촌, 단군세기)를 이맥은 "가림다"(십일당 주인, 태백일사 소도경전 본훈)라는 표현을 참고한 것이다.

가림토는 가림(분별)하는 토대 즉 땅이라는 의미로 그 뜻을 택해 토(土)를 썼고, 기다림다는 가림하는다(따,땅)라고 다를 썼으나 같은 뜻이다.

환단고기가 위서라면 한가지로 표현했을 것이다.

 

스물세 번째는 환단고기의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제4 마한세기 상의 "소도蘇途가 세워지는 곳마다 산상웅상山象雄常을 보게 되었다"는 표현에 비밀이 숨어 있다. 이 맥 선생이나. 안호상 박사, 환단고기를 번역한 임승국 교수도 뜻을 잘 몰랐는데, 구길 수 선생이 최치원의 천부경 81자는 본 천부경 16자(하나, 둘, 셋 ,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0을 풀어낸 시첩이라는 비밀을 풀어내면서 ."남근상이 모셔진 소도"라 풀어 산상웅상이 남근이라는 것을 밝혔다.

소도는"솟다"에서 와서 소터 솟토 소토 소도 솟대가 되었고, 소도에 솟은 것은 처음에는 "박달나무로 된 환웅상"인데 그것이 여음(돌무더기로 표현)에 삽입된 남근상 (힌두교의 시바 링가)이 솟아 있다는 것이다.

보통 소도에는 큰 나무를 세워 방울과 북을 달아 놓고 신을 섬기게 되었다 한다.

이는 환단고기를 쓴 이가 전해지는 말이나 책의 내용을 자신도 이해하지 못해 원저본을 그대로 썻던 것이므로, 환단고기는 위서가 아니라는 한증거이다.

 

 

 

 

사실상 실증학을 내세우면서 사대식민사학자들의 전위에 서서 글로써 환단고기를 위서라고 물아 붙이던 경희대학교 사학과 조인성 교수도 단군학회가 주최한 1999년 5월7일 고려대학교에서의 전반기 학슬회의 "환단고기으 ㅣ사료적 검토"에서는 종전 입장에서 한발 물러난 인상을 주고 있다 , 그것은 조 교수의 글 제목 자체가 종전에 주장하던 " 환단고기는 위서"가 아니고"환단고기에 대한 몇 가지 의문"이라고 하였으며, 그 본론의 대 전제로  "여러 모르 추론과 잘못이 많을 줄 안다 , 많은 가르침을 바랄 뿐이다"라고 후퇴한 듯 의미가 애매모호한 말을 하고 있다.

조교수의 뒤를 이어 교원대의 송호정 교수도KBS역사 스페셜, 고조선논쟁(한국일보 2000.11.15.12.5.12.9)에서 본인이 제시한 위와 같은 환단고기 실증 사례 논점에서는 도피해 버리기도 했다.

사대식민적 강단사학의 전위에 선 것으로 보이는 ㅅ ㅗㅇ호정 교수는 새해들어 모 위성방송과<한국 고대사속의 고조선사>라는 책을 통하여 우리 역사상 최초국가인 고조선, 즉 단군조선을 작고 초라하게 그려 파장을 일으켰다.

송호정 교수의 주장의 요지는 문헌자료에 의했다면서 고조선의 시작은 BC 7~8세기이고, 그 영역은 평양을 중심으로 한 요동과 일부 서북한 지역에 한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송교수의 방송과 책이 나가자,"왜 우리의 민족사를 축소했느냐"라든지 "너는 식민사학자.민족반역자, 역사왜곡자다ㅣ"라는 등의 항의와 인신 공격이 쏟아져 송교수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9조선일보 2003,2,15조선일보 '고조선사 과장 아닌 시체로 보자'참조)

 송호정 교수의 <한국 고대사속의 고조선사>는 너무나 많은 문제점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이를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1.실증사학을 내세우면서도"강력한 왕권에 기반한 고대국가로 출발했다는 설정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근거 없는 상식적 추리로 시작했다

2. 역사학계의 통설은 고대국가의 시작은 법제와 청동기 문화의 존재로 본다.단군조선은 범금 팔조법과 1단군 3한 3사5가 6사의 정치 체계를 갖췄으며 한반도아 만주지방 등에서 골고루 발견되는 비파형 청동검을 비롯하여 총동단추, 고인돌 등 단군 조선의 유물들이 존재하므로 지금부터 약 4,300여 년 전에 민족국가 단군조선이 건국된 것인데 송교수는 단군조선을 사실상 ㅂ ㅜ정하는 주장을 제기한 것이다(동지 중앙일보 2003,2/12  26쪽 송호정 교수 고대사 연구서 파장 예고)

3.본인이 제시한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에 대한 논증에 대한 답변은 회피하고, 환단고기를 깊이 연구도 하지 않고 무조건 위서로 몰았다.

4,한국 사학계의 통설인 고조선 중심지 이동론과도 다르게 사대모화적으로 중국 고고학계 시각에 치우치고 이병도 교수의 견해인 평양 중심론에 빠졌다.

5.한반도와 만주지역에 출토된 고조선의 비파형 동검은 중국의 곳과 다른 바, 동호나 산융의 실체를 밝히지 못했으면서도 단군조선 문화적 유물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요서지역 비파형동검을 산융과 동호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6, 송교수가 가장 내세우는 문헌사료로서 BC7세기 사정을 전한다는 관자 官子는 그보다 훨씬 후대인 전국시대 이후에 씌여진 책이다.

7,고조선 전후를 전체로 조감하지 않고 단절된 역사를 고찰했으며, 문헌자료에 의해 결론을 낸다면서도 '고조선이 연戀의 서쪽땅 2천리를 빼았겼다'는 위락魏略의 기록을 무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