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로 치닫는 석유시대

"지난해 러시아 석유 생산량은 내가 평생 목격한 최고치가 될 것이다."(러시아 석유업체 루코일의 레오니트 페둔 부사장) "전 세계 석유 공급 중 20%를 차지하고 있는 14개 유전 평균 나이는 45세다."(휴스턴 소재 석유 컨설팅펌 사이먼스앤코 매슈 사이먼스 사장) "우리는 40년간 쓸 수 있는 충분한 원유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다."(토니 헤이워드 BP 회장)

지난 15일 국제 석유시장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난감한 상황이 펼쳐졌다.

세계 2위 산유국 러시아 원유 생산이 정점을 찍고 감소하기 시작했다는 악재와 브라질에서 330억배럴에 상당하는 초대형 해저 유전이 발견됐다는 호재가 동시에 터져나왔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은 악재에 더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믿었던 러시아마저 석유 생산 상승세가 꺾였다는 사실에 국제유가는 배럴당 115달러를 넘어섰다. 브라질 신규 유전 발견은 '아직도 지구에는 인류가 모르는 석유 자원이 많다'는 낙관론을 갖기에 충분했지만 시장은 비관론에 몸을 더욱 움츠렸다. 거대 매장량 발견이 공식 매장량으로 집계되기까지는 불확실성이 여전히 크기 때문이다.

◆ 산유국 98國중 60곳 피크오일…"유가 곧 125달러" 전망도



= 유가 급등세에 잠잠하던 석유 종말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40년 뒤면 석유자원이 고갈돼 화석연료 기반 세계 경제에 큰 타격을 줄 것이라는 주장이다. 전 세계 석유 생산이 이미 정점에 진입했다는 경고도 잇따르고 있다.

이른바 1956년 킹 허버트 박사가 제시한 '오일피크론'이다. 허버트 예측대로 미국 석유 생산은 70년대를 기점으로 감소세로 진입한 바 있다. 허버트 이론을 계기로 제2, 제3 오일피크 이론이 대두됐다. 독일과 프랑스 정부는 2020년께 전 세계 석유 생산이 한계에 도달할 것이라는 전망 아래 대체에너지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미국 정부 피크오일 추정치는 2044년이다.

월스트리트저널도 최근 "2012년 전 세계 원유 생산이 최고 1억배럴까지 정점을 찍은 후 그 상태가 지속되는 '고원(plateau) 이론'이 부상하고 있다"고 전했다. 지금까지 고유가 배경으로 중국 인도 등 신흥시장의 폭발적인 수요 측면이 부각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석유 생산이 이미 정점에 달했다는 전망에 투기세력이 시장에 침투한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최근 유가가 급등세를 보이는 것은 석유 생산이 이미 정점에 진입했거나 임박했다는 염려도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실제 장기 수급난이 부각되며 원유 장기물도 가격이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5년물 원유 선물 가격도 배럴당 100달러로 6개월간 32.8%나 올랐다. 2016년 인도분 가격 역시 100달러 이상에 거래된다. 최근 유가 상승이 일시적인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현상이라는 근거다.

부니 피킨스 헤지펀드 BP캐피털 매니저는 17일 "단기적으로 유가가 배럴당 125달러를 돌파할 것"이라고 가격 초강세를 전망했다.



◆ 하루 20만배럴 생산 초대형유전 1980년 이후 단 4곳뿐
= 최근 오일피크론에 불을 지른 국가는 러시아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러시아 원유 생산이 올 들어 3월까지 하루 1000만배럴로 지난해 동기보다 1% 감소했다고 밝혔다. 세계 원유 공급 중 40%를 차지하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원유생산 역시 올 들어 3월까지 평균 하루 35만배럴 감소한 것으로 드러났다.

세계 최대 산유국 사우디아라비아 역시 대형 유전 고갈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미국 시사월간지 애틀랜틱먼슬리는 지난해 10월호에서 "사우디 원유 절반이 생산되는 가와르유전 북쪽 원유층 두께가 얇아져 원유가 거의 고갈됐다는 조사가 나왔다"고 보도했다.

이는 사우디 지질자료와 30년간 원유 생산량 추정치를 바탕으로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실시한 결과다. 사우디가 95년 개발을 포기한 카티프 해상 유전을 최근 재개발하기로 한 것 역시 기존 유전 고갈 의혹을 부추기고 있다. 사우디는 새 유전을 찾기 위한 굴착ㆍ시추 사업을 최근 3년 새 3배나 늘렸다.

영국과 노르웨이 '젖줄' 북해 유전도 이미 99~2000년부터 빠르게 고갈되기 시작했다.
유전이 고갈되고 있는 것은 북해와 사우디 문제뿐이 아니다. 98개 산유국 가운데 60개국이 이미 원유 생산에 정점을 찍었다고 런던석유고갈분석센터(ODAC)는 분석한 바 있다. ODAC에 따르면 이미 러시아와 미국 이란 멕시코 노르웨이 리비아 영국 인도네시아 등에서 석유 생산이 감소 국면에 진입했다.

60년대까지 활발했던 신규 유전 개발도 생각보다 더디다.
매슈 사이먼스 사이먼스앤코 사장은 "새로운 기술 개발에도 불구하고 하루 20만배럴 이상을 생산하는 초대형 유전 발견은 1980년 이후 단 4곳에 지나지 않았다"고 밝혔다. 70년대 12개, 60년대 15개, 50년대 9개에 비해 턱없이 낮은 수치다.

전 세계 석유 메이저는 80년대부터 첨단기술을 동원해 심해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매년 새로 캐낼 수 있는 원유 100억~150억배럴 가운데 대부분이 바다에서 뽑아내고 있다.

마이클 달리 BP 원유탐사 박사는 "앞으로 15~20년간 심해에서 캐낼 수 있는 원유는 1500억~2000억배럴로 추정된다"고 밝힌 바 있다.

◆ "40년후엔 바닥" 20년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통계 진실은



= 그렇다면 인류는 언제까지 석유를 캐낼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알려진 통설은 40년이다. 가채연수가 40년이라는 분석이다.
추가적인 매장량 확보 없이 계속 생산만 한다면 현 소비 수준을 감안할 때 길어야 2050년까지 석유를 쓸 수 있다는 통계다.

이 계산은 현재 확정 매장량을 연간 생산량으로 나눈 수치다. BP 자료에 따르면 2006년 전 세계 확정 매장량은 1조2082억배럴이었다. 하루 평균 산유량을 8200만배럴로 잡을 때 연간 산유량은 300억배럴을 넘는다. 이를 나누면 40.5라는 수치가 나온다. 즉 40.5년간 석유를 현재 수준으로 퍼낼 수 있다는 것이다.

매장량은 '현재 확립된 기술을 바탕으로 불확실성이 없이 상업적으로 생산 가능한 양'을 말한다.

여기에는 오일샌드와 생산은 가능하지만 경제적으로 생산하기 어려운 양을 의미하는 추정 매장량은 포함되지 않았다.

가채연수 계산은 이론적으로 간단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따지기 쉽지 않은 문제다.
우선 미래 석유 생산량을 추정하기가 쉽지 않다. 바다 밑에 얼마나 많은 원유가 묻혀 있는지, 기존 유전에서 얼마나 석유를 더 뽑아낼 수 있는지 예측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역시 87년 정치적인 이유로 매장량을 40% 부풀린 전력이 있을 정도다.

매장량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석유자원 추정량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생산비용과 기술적 어려움으로 생산하지 못하고 있는 추정매장량 9000억배럴도 향후 기술 개발로 언제든지 인류 에너지원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확인 매장량은 2000년 미국 지질조사국(USGS)이 직접 시추를 통해 이제까지 확인한 것으로 협의의 개념이다.

다만 가채연수가 20년째 제자리라는 사실은 종종 석유 종말론이 과장됐다는 지적을 받는 이유다.

BP가 80년부터 집계한 전 세계 석유 확인매장량을 연도별 생산량으로 나누면 이 비율은 80년 29에서 88년 43.2로 크게 상승한 뒤 20년째 40년이다.

장기 추세에서 생산이 수요량을 거의 충족한다고 볼 때 20년 전에도 가채연수가 40년이었고 지금도 40년이라는 것은 수요가 늘어나는 만큼 매장량 증가분이 이를 받쳐주고 있다는 뜻이다.

케임브리지 에너지연구소(CERA)는 2030년까지 세계 석유 생산이 피크에 도달하지 않을 것이며 세계 석유 매장량은 4조8200억배럴로 이미 생산된 1억800만배럴을 제외하면 여전히 3조7400억배럴이 남았다고 주장한다.



◆ 아직 효율성 떨어지지만…오일샌드 미래 구원투수 될까
= 획기적인 기술 개발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재래식 석유 자원에 크게 기대하기 어렵다는 게 상당수 전문가 견해다. 오일샌드 등 비재래식 석유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오일샌드가 기존 석유자원을 대체하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오일샌드 생산비용은 배럴당 20~25달러로 추정된다. 고유가 상승으로 일단 개발 채산성을 확보한 상태다. 그러나 에너지 추출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을 노출하고 있다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땅 속에 자원이 '있다'는 것과 '효율' 문제는 크게 다르다"면서 "오일샌드에서 석유를 100년 이상 뽑아낸다 하더라도 당장 지금 원유만큼 효율적이겠느냐"고 반문했다. 석유 고갈 문제보다는 석유를 생산하기까지 접근성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 점도 석유시장의 걱정이다.

구자권 석유공사 해외조사팀장은 "석유 매장량은 늘어나겠지만 문제는 캐낼 만한 여건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이라면서 "산유국 자원민족주의 움직임뿐만 아니라 메이저 석유회사들이 재투자를 꺼리는 상황도 큰 문제"라고 말했다. 석유 메이저가 최근 투자를 전년 대비 20~30% 확대했다고 공언하지만 투자 물량이 늘어난 게 아니라 채굴비용이 급증했을 뿐이라는 지적이다.

접근이 쉬운 유전은 주인들이 문을 걸어 잠그고 이제 남은 것은 투자비용이 많이 드는 극지와 깊은 바다뿐이니 정치ㆍ경제적으로 볼 때 석유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에너지원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